Friday, December 30, 2011

Thursday, December 29, 2011

못난이의 도전 28

-어리광

못난이의 도전 28

칠레사람들의 좋은점이자 좀 불편한(?)점은 사소한 것을 지나치게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큰 선물 안하고 자그마한 선물도 감사하고 좋아하는 점은 편하고 좋지만, 때로는 그 자그마한 일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때도 있다는 거다.

매년 국제한국학세미나가 끝나면 협찬품으로 받은 물건을 그동안 일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몇몇은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눠준 티셔츠를 자기도 줄 수 없냐고 한다. 평소에 내 일을 많이 도와주는 친구에게 늘 티셔츠를 챙겨주곤 했는데 줄 때마다 자기 사이즈가 아니라는 둥 불평이 많았다. (그러나 꼬박꼬박 챙겨간다)  몇년 째 그 불평을 듣고 있자니 나도 좀 기분이 언짢았다. 올해도 또 티셔츠 타령을 하길래 "너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어" 했더니 "큰거라도 줘" 하길래 못들은척 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너 나한테 빚진거있지" 한다. "뭐?" "나 티셔츠 주기로 해놓고 안줬잖아." 아니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게 무슨 소리야.. "너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다니까" "그래도 줘" "너 맨날 불평하잖아. 불평 안할거면 주지"

나의 전에 없던 반응이 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나의 인내심은 어디쯤에서, 얼마쯤에서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참아야 하는가.

Friday, December 23, 2011

그들의 도전 17

2007-2010 한국학논문대회 수상작들을 모아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사하며 읽을 때에는 아이디어도 참신하고 마냥 귀엽기만 했는데

Thursday, December 22, 2011

못난이의 도전 27

제4회 국제한국학세미나를 무사히 마치고 지인들께 이런 메일을 보냈더랬다.

(앞부분 생략)  여기서 잘 나가면 한국에서 누가 모셔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하고 산 시절도

Sunday, December 18, 2011

이웃집 남자 24

- 아/어/여 주세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문법에서 '부탁'을 가르칠 때 나오는 표현, "아/어/여주세요" 칠레남자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다.

Friday, December 16, 2011

그들의 도전 16

한국문화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산티아고 한인촌에 대한 발표를 했다.

Sunday, December 11, 2011

이웃집 남자 23

- 나를 웃게 하는 그

끈끈한 부부애를 자랑하는 (칠레)친구 A는 "남자랑 사는게 그렇게 좋아?"

Thursday, December 8, 2011

잘 먹고 잘 살기 20

한국학 학술대회에 참석하시는 외국인 교수님 몇 분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Wednesday, December 7, 2011

못난이의 도전 25

칠레에선 아차 하다 소매치기를 당하는 일이 많아서 식당이나 카페에 가도 가방을 꼭 무릎에 두고, 차에서 잠시 내릴 때에도 절대로 물건을 두고 내리지 않는다

Saturday, December 3, 2011

그들의 도전 15

Junior Panel 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각자 맡은 국가의 입장을 대변해야

Thursday, December 1, 2011

잘 먹고 잘 살기 19

Junior Panel 참가학생들과 모임을 갖던 중 산티아교 근교 지방 출신 학생이 "교수님 숯불빵 드셔보셨어요?"

Wednesday, November 30, 2011

못난이의 도전 24

2008년 제1회 국제한국학세미나를 조직할 무렵이었다. 지금만큼도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절절 매고 있을 때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시는 어느 (한국)분과 마주쳤다.

Saturday, November 26, 2011

Thursday, November 24, 2011

Wednesday, November 23, 2011

못난이의 도전 23

칠레에 대해 가장 할 말이 많았던 때는 1년 여 지났을 때 쯤인 것 같다.

Monday, November 14, 2011

못난이의 도전 21

2010년 국제한국학세미나를 한 달 여 앞둔 때였다. 학술대회 전반적인 준비, 발표를 하네 안하네 몇달 째 속을 썩이는 분 어르고 달래기(?),

Sunday, November 13, 2011

이웃집 남자 19

(칠레)여자들 모임에 갔더니 누가 남친으로부터 배신당한 얘기를 하며 분개했다.

Tuesday, November 8, 2011

이웃집 남자 18

칠레에서 남자를 보고 앗 깬다 싶을 때는 언제인가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Friday, October 28, 2011

Wednesday, October 26, 2011

못난이의 도전 18

다이어트랍시고 시작을 하고서야 내가 칠레에 온 이후 빵에 중독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Monday, October 24, 2011

잘 먹고 잘 살기 14

-재외국민보호

연수 차 칠레에 와 있던 P내외는 가끔 금요일 밤에 와인 한 병을 들고 오곤 했다.

Sunday, October 23, 2011

Thursday, October 20, 2011

Tuesday, October 18, 2011

잘 먹고 잘 살기 13

(칠레)교수님 내외분이 한국에 잠시 가셨는데 칠레대사관저에서 식사초대를 하고 후식으로 복숭아 반쪽

Sunday, October 16, 2011

못난이의 도전 16

-나 잘났소

가끔 (아니 흔히) 칠레사람들, 특히 칠레여자들의 지나친 자신감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Thursday, October 13, 2011

그들의 도전 8

아시아학생들은 칠레에 오면 서로 상대적 친근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Monday, October 10, 2011

Saturday, October 8, 2011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3

이태리 (여)교수와 연구실을 쓸 때다.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해서 갔더니 온통 이태리 사람들 뿐이었다. 산티아고에 있는 이태리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는 집주인의 남자친구

Friday, October 7, 2011

잘 먹고 잘 살기 10

칠레음식전시회가 있어 다녀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와인시음티켓을 샀다.

못난이의 도전 14

몇 년 전 한국의 어느 신문과 이메일 인터뷰를 하고 나서 밤새 펑펑 울었다.

Wednesday, October 5, 2011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10

영어와 스페인어가 비슷하기 때문에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다.

그들의 도전 7

집안일은 관심/소질 모두와 친하지 않거늘 게다가 일에 치여 지내는 학기 중에는 말할 것도 없는 내 꼴을 보고 친구가 자기집 도우미아주머니를 하루만 부르라고 했다.

Tuesday, October 4, 2011

이웃집 남자 13

San Pedro de Atacama 사막에 다녀온 후 독일할아버지가 가끔 전화를 하셨다.

못난이의 도전 13

19세기 말부터 격변하는 한국역사에 대해 설명할 때 흔히 우리 외할머니의 예를 들곤 한다.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9

스페인어 숫자도 영어와 마찬가지로 3자리 단위로 나뉘어진다.

Monday, October 3, 2011

잘 먹고 잘 살기 9

-삼겹살 찾아 삼만리

고등학교 가정시간에 고기부위를 배우며 도대체 이런걸 왜 배워야하나 했다.

이웃집 남자 12

몇년 전 성당에서 나오는데 어느 노신사가 나를 불렀다.

못난이의 도전 12

명색이 와인의 나라 칠레에 살면서 와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어서 소믈리에 과정을 알아본 적이 있다.

Sunday, October 2, 2011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4

교환학생 S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교수님, 제 성격이 조용해요?" 칠레친구들이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서 아무 일도 안했다/별 일 없었다고 하면 애들이 이상하게/안스럽게/심지어 불쌍하게 본다는 거다. 자기는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 지내냐고 한다는 거다.

Saturday, October 1, 2011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2

칠레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 한창 집을 구하러 다닐 때다. 깔끔해 보이는 아파트가 맘에 들어 안에 들어가 경비아저씨에게 빈 집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일본 사람? 중국사람?" 한국사람이라고 했더니 "언제 칠레에 왔니?" 묻더니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졌다. 칠레 신문에 북한 핵문제 뉴스가 거의 매일 나오던 때였다. 아저씨가 물었다. "너 혹시 핵무기 위험을 피해 칠레로 도망 나온거니?"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3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1

못난이의 도전 11

제4회 국제한국학세미나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Junior Pannel이 계획되어 있어 참가학생들이 매주 금요일 우리집에 모여 토론을 한다. 여러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구성하는, 나로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일이지만,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8

B군의 질문

Q.
ser와 estar가 늘 헷갈려요. 예를 들어: La reunión es mañana. La reunión está en el segundo piso. 왜 첫번째 경우는 ser를 쓰고 두번째는 estar를 쓰죠?

Friday, September 30, 2011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7

-H군의 이메일 질문:

Q.
다름이 아니라 요즘 스페인어에서 한글로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궁금한 것이 있어 이렇게 질문드립니다.

한글 문장 : 신문은 뉴스, 정보, 사설, 기사를 제공해준다.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6

스페인어에서 절대로 아끼지 말아야 할 말이 바로 Gracias다.

못난이의 도전 10

-내가 외국어에 소질이 있다고?

브라질 대학 학자들과도 가끔 연락할 일이 있는데 그쪽 아시아학 관련 소식을 받아보면 같은 라틴어계통이라 무슨 소리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확실하지 않아 답답한 포르투갈어가 문제였다. 마침 산티아고에 있는 브라질문화원에서 1월 집중강좌를 연다고 해서 신청을 했다. (1월 집중강좌 인기는 정말 대단하다.)

Thursday, September 29, 2011

그들의 도전 6

한국에 다녀오면서 (미국)친구 B에게 한국화장품샘플 몇 개를 주었다.

잘 먹고 잘 살기 8

살이 찌는 데에도 단계가 있다. 처음에 몸이 불기 시작하면 약간 갑갑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 단계만 지나면! 몸이 몸에 적응을 해서 오히려 편안해진다. 그 정도가 되면 운동도 귀찮고 잘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더 하게 된다.

그러다 오랫만에 한국에 가면 갑자기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모두가 날씬날씬, 보는 사람마다 하는(해주는?) 인사: "어머 선생님 좋아지셨어요" , 조금 더 친한 사람의 "선생님 살이 좀 붙었네?" 아주 친한 친구의 "얘, 너 관리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칠레다이어트식에 대해 연구(?)해 본 결과, 결국 가장 좋은 다이어트식은 한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매일 된장찌개, 김, 김치만 먹으면 한 달 안에 5Kg는 빠질 거라는 나름의 확신이 생겼다. 고로, 내가 살을 못 빼는 이유는, 매일 그렇게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도 생겼다.

잘 먹고 잘 살기 9
잘 먹고 잘 살기 7

못난이의 도전 9

-장롱면허

칠레에 올 때 국제운전면허증을 받아왔다. (정작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때는 1년 후면 다시 한국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칠레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Wednesday, September 28, 2011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3

-아무 생각없이

대학에서 처음 스페인어를 배울 때 외국인회화선생님께서는 첫 시간에 스페인어이름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시면서 마음에 드는 이름 하나씩을 고르라고 하셨다. 내 성의 이니셜과 같은 M이 들어간 이름 하나를 '아무 생각없이' 골랐는데, 이후에도 외국인회화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잊지 않으신 덕에(?) 바꾸고 싶어도 바꾸기가 어렵게 되었다.

칠레에 와서도 사람들이 내 한국이름 부르는걸 어려워해서 간단하게 소개하고 끝내고 싶을 때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데 칠레는 서류/문서를 중요시하는 곳이라서 이력서를 제출하거나 할 때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아닌 스페인어 이름을 사용하면, '이 서류가 네 서류냐'로 더 복잡하기만 했다.

내 한국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면서 보니, 공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Wonjeong이 되어야 하는데 여권 만들 때 또 '아무 생각없이' Wonjung으로 써넣어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었다. 여권표기와 동일해야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이름을 잘 모르는 칠레사람들은 나를 Wo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Wong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Wong Jung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멋대로다. 한국사람이 성을 앞에 쓴다는 것을 주워들은 사람들은 내 이름과 성을 제멋대로 바꾸어서 Jung Ming Won을 만들기도 한다. 한국사람들이 외국사람들 힘들까봐 성만 사용하거나 이름의 첫 글자만 사용하는 것을 아는 어떤이들은 너는 왜 약자로 쓰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내 주위의 동료들과 친구들은 정확한 발음이 뭐냐고 확인해가며 이제 모두 나를 Wonjung이라고 부른다.

칠레친구들이 네 이름은 무슨 뜻이냐고 물어 '아름다울 媛'에 '물이름 湞'이라고 말해주니 다들 감탄한다. 너희 부모님은 왜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냐길래 "내가 사주에 물이 부족해서 '물이름 湞'을 넣은거래."하니 C가  "가만, 그럼 왜 '아름다울 媛'을 넣어주신거지? 너 태어났을 때 무지 못생겼었나보다" 하자 F가 "여자애니까 그런 글자도 하나쯤 넣지 않았을까? C, 너 또 Wonjung 놀리니?"해서 다들 웃었다. 그러나 C도 F도, 다른 칠레친구들도 매사에 뜻을 새기는 한국문화가 무척 아름다워보인다고 한다. 이름이 그대로 세례명이라 세례명의 개념이 없는 칠레친구들은 작은 어머니께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내 세례명을 Helena라고 지어주셨다고 하면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다고 한다. (칠레)신부님께서는 내 한국이름도, 내 세례명도 다 너무 예쁘다며 꼭 Wonjung Helena를 동시에 불러주신다.

내게 오는 우편물이 가끔은 다른 캠퍼스에 있는 공자학당으로 가기도 하고, 좀 특이하다 싶은 이름의 우편물은 다 내 앞으로 올 때도 있다. 대만무역관에서 국경일 행사 초청장이 왔는데 Wong Jung Ming 여사 앞이다. 그래,  부모님께서 이모저모 다 헤아리셔서 지어주신 이름을 내가 '아무 생각없이' 스페인어이름도 짓고 '아무 생각없이' 영문표기도 하고.. 그래서 받는 벌이다, 했다.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4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2

그들의 도전 5

-한국여자와 키스하고 싶다면

Tuesday, September 27, 2011

Monday, September 26, 2011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4

스페인어를 지칭할 때 español이라고도 하고 castellano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웃집 남자 11

-서로의 취향 이상 무
모임에서 우연히 (미국)친구 M을 만났다.

못난이의 도전 8

-이게 왠 떡이지?
칠레에 도착해서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의 모 법대교수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칠레水法을 번역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칠레의 공공기관 사이트에는 영어버전이 없고 미국 대학들의 공식번역료를 알아보니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하셨다. 그 무렵에 몇 군데 지방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긴 했으나 당장 1, 2월 방학 생활비가 막막하던 차에 옳다구나 하겠노라고 답을 했다. 답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번역료의 반이 입금되었다. pay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이게 왠 떡이지?

-공짜는 없다
번역을 시작하고 아차 싶었다. 너무 어려웠다. 우리나라 법전도 읽으면 알까 말까 할 것을 남의 나라 말로 보려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칠레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일반인"들이 그런걸 어떻게 아냐고들 했다.

-물의 정의
첫 구절부터 난감했다. '물'의 정의. 사전을 찾으면 전부 호수, 늪, 늪지, 연못이 반복되는데 스페인어로는 한도 끝도 없이 표현이 많았다. 문장 구성도 일반 문장과는 달랐고... 받은 돈 물릴 수도 없고, 한숨만 나왔다.
반 정도 하다보니 반복되는 용어가 보여 따로 정리를 해봤다. 친구가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변호사를 소개해줘서 내 사정을 알고 무료로 메신저 상담을 해줬다. 법전에 쓰이는 문장이 일반 문장과는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알고 나니 조금 수월해졌다.

한국에서 교수님과 조교가 와서 교수님의 설명까지 듣고 나니 처음처럼 법전까막눈 면하는 티는 낼 수 있게 되었다. 칠레 몇몇 군데 댐과 강, 호수 등 '물' 구경을 하고 나니 자연환경상 왜 그렇게 '물'의 정의가 복잡한지도 알게 되었다. 칠레사람들이 법을 대하는 태도를 알고 나니 다른 일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아주 약간은 편해졌다.

이후에는 다시는 번역본을 들춰보지 않았다. 나한테 너무 부끄러울걸 잘 아니까. 그런데 그 어설프고 얄팍한 지식으로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저 연못 주인은 누구일까, 저 강 주인은 어디서 갈라질까, 혼자 생각을 한다.

못난이의 도전 9
못난이의 도전 7

못난이의 도전 7

칠레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주재원 L께서 날 부르시더니 당신과 가족들의 스페인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셨다. 요즘은 스페인어과외교습이나 통역을 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절박하게 필요했으나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을 때였다.

 L 댁은 산티아고 부촌에 위치해있었다. 지하철도 버스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사모님께 길을 여쭤보니 지하철 -- 역에서 colectivo (지하철 역에서 그 주위를 오가는 일종의 합승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셨다. 1월 여름 아침에 그 댁으로 가는 colectivo를 타면 주로 부촌에서 일하는 도우미아주머니들과 정원사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 시건방진 계급의식이 발동해서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택시를 타는 나 자신이 괜히 서글퍼졌다. 내가 이게 뭔가...

그런데 차차 colectivo 타는 일에서 재미를 발견했다. 우선 지하철 역에서 L 댁까지 colectivo가 가는 길이 승객들에 따라 약간씩 달라졌다. 누구는 어느 모퉁이에서 내려주세요, 누구는 어디 앞에서 내려주세요, 다니는 지역 범위는 정해져있으나 그 안에서 가는 길은 승객이 가는 곳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부잣집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colectivo 기사 아저씨와의 대화도 재미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내릴 때마다 그 주위 부잣집 구경도 실컷 했고 칠레사람들이 '길'을 설명하는 방법이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동네 사는 사람들도 시내에 나갈 때에는 굳이 차를 가지고 가지 않고 colectivo를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요즘도 나는 colectivo를 자주 애용한다. 우리 집에서 (미국)친구 B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5천 페소 (우리돈 만 원 정도)가 넘게 나오지만 집에서 몇 블록 걸어가 colectivo를 타면 500페소 (우리돈 천 원)이면 갈 수 있다. 이제는 굳이 친구집 바로 앞까지 가지 않아도 어느 모퉁이에서 내려야 100페소 덜 내는지 잔머리도 쓴다. 얼마 전 colectivo를 탔더니 기사 아저씨가 나한테 슬쩍 600페소라고 한다. "에잇, 아저씨 무슨 소리예요" 씩 웃으며 500페소짜리를 건내 주니 "어라라, 하하하하" 한다.

못난이의 도전 8
못난이의 도전 6

잘 먹고 잘 살기 7

전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S가 출장왔다고 연락이 왔다. Study Group ASIA의 초기 멤버고, 내 칠레 생활 초기, 지금보다도 더 헤매고 부딪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S다. 요즘은 아이들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한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니 와.. 우리도 그랬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때보다 엄청나게 발전했네요, 한다. 과연 "이거 안해요, 저거 안해요?" 하는 지금 아이들은 그때 그 시절이 있어서 오늘도 있다는걸 알까?

S와 얘기하다 보니 내가 비빔밥을 웃으며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게 너무 좋아 미소가 지어졌다. (see 잘 먹고 잘 살기 6) 그때 나는 지금 사는 집의 마루보다 약간 작은 원룸에 살았는데 전기스토브가 너무 오래 되어서 (게다가 주인 아주머니는 20년도 더 된 물건들을 다 새 것이라고 우기며 고장나는 물건마다 나더러 다 새로 사 내라고 해서...) 어느 분이 주신 부루스타를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오면 부루스타에 계란을 부쳐 비빔밥을 해주곤 했었는데, 그 허접한 밥도 맛있다고 먹으러 오던 (한국)학생들이 있었고 S는 그 중 한 명이었다.

드디어 방이라는게 딸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부루스타는 꼴도 보기 싫어 누군가에게 주었고 한동안 비빔밥을 안먹었었다. (이후에는 내가 왜 비빔밥을 싫어하는지 기억을 못했다. 어머니께서 고추장 볶아 주시며 반찬 없으면 밥 비벼 먹으라고 하실 때에도 왜 시큰둥했는지 이제서야 알겠다.) 얼마 전 즐겁게 비빔밥을 먹은거 보면, 그리고 또 해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걸 보면, 내가 이제 부루스타비빔밥 증후군에서 벗어난 듯 하다. 내 삶에 감사.

잘 먹고 잘 살기 8
잘 먹고 잘 살기 6

이웃집 남자 10

어느날 낯모르는 (한국)남자가 전화를 했다.

"민교수님이시죠?"

Sunday, September 25, 2011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3

중남미사람들에게는 우리들에게 나훈아, 남진 아저씨와 비슷한 느낌인데 한국의 라틴뮤직팬들에게 나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수가 루이스 미겔 (Luis Miguel)이다. 그런데 가끔 라디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서 '루이스 미구엘'이라고 발음/표기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2

영어사전과 스페인어사전을 펼쳐보면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차이가 '발음기호'의 있고 없음이다. 스페인어는 발음과 악센트 규칙만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그리고 우리말에는 없는 /f/와 /rr/ 소리만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면 최소한 발음 정도는 큰 실수 없이 할 수 있는 언어다.

스페인어를 곧잘 하는 사람들도 -ia로 끝나는 경우 (예 historia)와 -ía로 끝나는 경우 (예 economía)를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다 -ía로 i에 악센트를 두어 발음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웃집 남자 9

-가물가물한 "그"
집을 나서는데 같은 층 누군가 열쇠로 대문 잠그는 소리, 이어 엘리베이터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니 내가 올 때까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한 얼굴이었다. (나쁘지 않다~ 울랄라~)  나더러 대뜸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들의 도전 4

-살인 미수

잘 먹고 잘 살기 6

-교수님, 저는 밥이 필요해요.
칠레에 연수차 오신 K기자님께 한국문화수업시간에 특강을 부탁드렸다. 수업이 6시 20분에 끝나서 그냥 우리집에 가서 간단히 저녁이나 하시자고 말씀드리고 멤버들 (교환학생, 인턴 등등)을 소집했다.

나는 주중에는 냄새나는 음식을 잘 안해먹기 때문에 와인 안주 삼아 피자를 먹을까 했는데 교환학생 S가 조용히 말했다. "교수님, 저는 밥이 필요해요."

-비빔밥 2라운드.
밥과 각종 야채, 그리고 한국에서 공수해 온 볶은 고추장, 참기름, 깨소금, 후리가케 등을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밥 한 번 더 앉혀야겠죠?" 다들 말이 없다. (그럴 필요 없다고도 안한다) 비빔밥 2라운드. "이번엔 계란이랑 후리가케만 넣고 비벼볼까요? K기자님, 계란 몇 개 부치면 될까요?" "거.. 후라이팬 공간이 허락하는 대로 부치시죠."

잘 먹고 잘 살기 7
잘 먹고 잘 살기 5

Saturday, September 24, 2011

칠레미장원탐방기 2

어느 12월이었다. 학기도 끝나가고 1년 치 피로가 몰려와 피곤하기도 하고, 또 연말이구나, 무덤덤한 척 울적할 무렵이었다. 피곤할 틈도 없이 방학에 해야할 일들이 몰려올 무렵이기도 했다. 친한 (한국) 교수님 한 분이 메일을 주셨다. 몸도 마음도 전같지 않고 폐경이 오는지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나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 메일을 받고 갑자기 우울해졌다. 연말연시와 겹쳐 우울함이 더했다. 거리에 나가니 온통 혼자 거리를 걷는 할머니들만 눈에 띄었다. 내가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분도 나이듦을 안타까워 하는데, 난 여기서 혼자 이렇게 죽어라 일만 하다 늙겠구나, 서러움이 몰아쳤다. 그 날 따라 거울을 보는데 흰머리까지 하나 눈에 띄어 내 기분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어느 모임에서 동양사람들 나이 가늠 못하는 한 외국이웃남이 " 너 서른은 되었니?"하는 그 한마디에 난 또 금새 히죽히죽 기분이 좋아졌다.

주책맞은 노인네들을 보며 '곱게 늙자'가 한동안 내 화두였었다. 어차피 누구나 먹는 나이인것을,  이왕이면 곱게, 잘,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마 나는 그냥 누군가 또 어리게 봐주면 히죽히죽 좋아하는 철없음을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칠레미장원탐방기 3
칠레미장원탐방기 1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1. 스페인어 속으로 더 깊이

몇년 전 스페인어 기초 문법책을 한 권 썼다. 제목은 [스페인어 속으로]. (물론 지금 다시 들춰보면 너무 부끄럽다) 얼마 전 한국에 갔더니 이 책이 아직도 서점에서 팔리고 있었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L.A. 에서도 이 책이 팔린다고 한다.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조카가, "와, 고모책이다, 그럼 고모 돈 벌어?" 하길래, "아니, 이 책은 그냥 세상빛 본 것만으로도 만족해." 그러자 조카 왈, "그럼 고모 책 한 권 더 써." "뭐라고 다시 써?" "스페인어 속으로, 더 깊이!"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2.
잘 먹고 잘 살기 1

이웃집 남자 8

-이태리 남자
이태리교수 M과 연구실을 같이 쓸 때였다.

Friday, September 23, 2011

못난이의 도전 6

- 얼결에 직장이 된 곳
나는 칠레가톨릭대학교가 어떤 학교인지도 잘 몰랐었다. (이렇게 좋은 학교라는 걸 알았으면 겁이 나서 이력서를 못 넣었을거다) 그냥 이력서 들고 이리저리 다니다 우연히 일하게 된 학교였을 뿐이다. 몇 개월째 일자리를 찾아다니느라 지쳐 있을 무렵 지하철에서 내려 캠퍼스를 보는 순간 너무 예뻐서, "와.. 여기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얼결에 개최된 국제한국학세미나
2008년. 너무 힘든 한 해였다. 그 누구도 내가 칠레에 머무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프로젝트를 따게 되어 1년만 더, 1년만 더 하던 것이 얼결에 교수도 되었다.
그 해에는 유달리 힘든 일이 많았다. (내가 온갖 고민을 끌어 안고 내 신세를 볶기도 했다.)  생각했다. 그래, 까짓거, 일 벌이자. 그래서 잘되면 좋은거고 안되면 이 나라 뜨면 그만이지. 그래서 벌인 일이 국제한국학세미나였다.

조직까지는 어지어찌 혼자 하였으나 행사가 다가오자 정작 당일에는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전에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데 그 날 나 좀 도와달라고. 행사는 9시에 시작인데 시간이 되는 사람은 8시까지 와주면 좋겠노라고.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이 답을 해왔다. 칠레에 연수 차 와 있던 P경감이 학생들에게 유니폼을 입히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그럴 돈은 없어서 청바지에 하얀 티를 입고 오라고 했다. P경감이 자원봉사 학생들 주라고 빨간 모자를 선물해주었다.

행사 당일, 오전 8시에 학교에 도착하니 15명의 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바지에 하얀 티를 입고...  오전에는 늦잠을 자서, 수업 때문에 등등 하며 오후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와서 일을 도왔다. 그리고 자기들을 Team Korea라고 이름지었다.

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시내에서 (한국식)스시집을 운영하시는 D사장님께서 "아이들 데리고 오세요"라고 하시더니 노래방까지 내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국제한국학세미나가 올해로 4회째가 된다. 늘 그렇듯 난 11월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할 일이 너무 많아 오래 잘 수 없고 긴장이 되어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게다가 요새는 이렇게 블로그질까지 하고 있다) 

가끔 억울하고 화나고 힘이 들 때 하얀 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를 기다리던 학생들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힘이 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보다 도와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힘들다고 징징대는건 너무 복에 겨운 소리다.

"이게 이 학교에서 내가 하는 마지막 일이야" 라고 거의 매일을 화내고 투덜거리던 나에게 (칠레)친구 C가 그랬었다. "아마 1회 세미나가 될걸?"



못난이의 도전 7

잘 먹고 잘 살기 5

어느 날 (미국)친구 B 집에 갔더니 샐러드에 뿌려 먹으라며 잘게 썰어 올리브유에 넣고 끓인 (칠레)고추를 주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멕시코식 할라페뇨와는 색다른 맛이었다. 친구에게 만드는 법을 물어 한번 해보니 급할 땐 김치 대용으로도 그럴싸하고 고기 먹을 때, 샐러드 먹을 때 곁들이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바게트빵에 버터 대신 발라 먹어도 정말 맛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멕시코 고추나 한국 고추로 만들면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올리브유고추요리를 즐겨 만든다고 하자 친구는 올리브유를 활용한 여러 가지 요리를 알려주었다. 버섯, 가지.. 여러 야채를 올리브유에 넣어 끓일 때 손질하는 법, 야채에 따라 달리 넣는 기타 재료까지 아주 친절하게.

오늘 점심은 일요일에 만들어 얼려 놓은 스페인식 tortilla 한 조각과 올리브유고추소스를 얹은 샐러드. So good!



Thursday, September 22, 2011

이웃집 남자 7

-혼자 사는 그녀
혼자 사는 (여자)주재원 K가 우리집에 자주 왔었다. 내가 집에서 밥을 해먹는다는걸 알고 언젠가부터는 거의 매일 저녁 퇴근을 우리집으로 할 정도였다. 학교에 안가는 날은 점심마저도 와서 먹곤 했다.

-라이벌
칠레에 사업체가 있어 1년에 반은 미국에서, 나머지 반은 칠레에서 보내는 (미국)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섹시한 흑인이다. 사업체가 지방에 있어서 칠레에 오면 우리집에서

Wednesday, September 21, 2011

못난이의 도전 5

학생 E가 자기가 다음 학기에 수업조교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고 내가 하는 한국학관련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이었다. 마침 연구프로젝트를 따게 되어 두 가지 일을 부탁했다.

그 해 E가 운이 좋았던지 추천서만 써주면 덜커덕 합격이 되곤 했다. 한국단기장학생으로 뽑혀 두 주일간 한국에 다녀오고 미국 모대학 한국학센터 겨울방학 Intensive Course에도 장학생으로 뽑혀 10주간 다녀왔다. 한국에 갈 때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고 신나하던 E는 미국까지 가게 되자 그야말로 기고만장해졌다.

미국에 다녀오더니 자기에게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미국에 가보니 여러 대학 한국학학과 학생들이 모여 같은 주제로 토론을 하는 Workshop이 있더라며 그걸 칠레에서 해보고 싶다고 했다. "미국과 칠레는 상황이 다르잖니. 거기는 아시아학의 역사가 길고 한국학과가 있는 대학도 여러 곳이니 같은 주제로 토론이 가능하지. 하지만 칠레는 이제 아시아학이 겨우 발걸음이고 그나마 아시아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대학도 얼마 안되잖아. 어렵지 않겠니? 일단 Study Group ASIA (내가 이끌고 있는 동아리)에서 실험적으로 해보고 주제를 좀 넓혀보면 어떨까?"

E는 당돌하게 말했다. "아시아프로그램 교수들 profile을 봤는데요. 교수님 (나)은 여러가지 일을 많이 하시잖아요. 다른 교수님들도 학교에 무언갈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지 않겠어요? 이건 제가 아시아프로그램을 위해 특별히 기획한 거에요. 교수님 (나)한테 새로운 실적 드릴 생각으로 기획한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나한테 말을 꺼냈니? 이런 종류의 Workshop은 미국, 한국, 유럽.. 어디에고 널린거야." "아, 제가 다른 교수님들을 몰라서요. 소개만 해주세요." "글쎄, 나라면 Study Group ASIA에서 실험적으로 해보고 칠레에서도 먹히는 일이면 다른 교수들에게도 말해보겠다." "좋아요. 그럼 다음 Study Group ASIA 모임에서 얘기해보죠."

다음 Study Group ASIA 모임에 그녀가 오지 않았다. 그날 사정이 있어 못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럼 일단 대충 안을 잡아보고 나중에 더 구체적인 계획을 짜자, 학생들과 얘기해보겠노라고 해두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E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데 다같이 나눠서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안을 꺼냈다. 아이들이 이러저런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말그대로 Workshop이 있어 미국에 갔는데, 얼마 안 있어 E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이 왔다.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답게 거의 항의서에 가까운 메일이었다. 자기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어떻게 맘대로 휘두르느냐가 주제였다. 이어 페이스북에는 '베끼기'와 관련된 규정을 복사해놓고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교수에 대한 글을 올렸다. (내 이름은 안 올렸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다른 학생 B가 나와 E를 '화해'시켜주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얘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내가 그동안 뭘 가르친건가, 서운하고 괘씸하고 허무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이러라고 추천서 써줬나 유치한 생각도 들었다. Workshop에 오신 친한 미국인교수님께 얘기를 하니 "독창적인 아이디어? 베끼기? 하하하하하" 박장대소를 하셨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사람 보는 눈도 쑥맥이었는지 허망하다고 맥빠져 하는 나에게 교수님께서는 "Wonjung, don't mind. 네가 칠레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봐. 네가 거기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네가 누굴 조교로 쓰고 싶어도 아는 애가 몇 명이나 되었겠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니 네가 조교로 쓴거 아니야. 지금은 더 많은 학생을 알지? 이건 그냥 약이 되는 경험일 뿐이야. 그런 녀석들보다 좋은 녀석들이 더 많지. Wonjung, 우리가 왜 선생을 하는지 알아? 그런 기분 찜찜한 녀석들보다 앞으로 만나게 될 더 좋은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야."

못난이의 도전 6
못난이의 도전 4

잘 먹고 잘 살기 4

-뭐 새로운 게 없을까?
"김치"를 대신할 새로운 맛을 찾는 것은 칠레 생활의 일상. 양배추 김치에도 물리고 각종 상추 김치도 시들해질 무렵 장아찌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아는 분 댁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사모님께서 직접 담그신 샐러리 장아찌를 주셨다. 어라, 이거 맛있네? 상큼한 맛이 있었다.

-네XX에 물어보세요.
인터넷으로 샐러리 장아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장아찌의 장점은 양배추/상추 김치보다 오래 간다는 거였지만, 간장을 끓일 때 나는 냄새가 문제였다. 한번 끓인 간장을 며칠 후에 또 끓여야 하기 때문에 금요일과 일요일 시간을 잘 맞춰야 했다. 하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오래 두어도 상관없고 남은 간장으로는 장조림이나 메추리알 조림을 만들 수도 있어서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변신하는 자는 무죄
요즘은 다시마도 넣어보고, 레몬도 넣어보고, 무, 양파, 고추 등 각종 야채를 넣어서 한국 야채와 맛에 어떤 차이가 나는지 비교 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같은 야채도 한국야채와는 맛에 차이가 있다.) 칠레판 경동시장, 슈퍼마켓, 반찬가게 등에서 파는 오이피클/샤를롯양파피클도 사 먹어 보았지만, 역시, 내 샐러리 장아찌가 최고야, 잘난 척하는 기분도 제법 괜찮다.

잘 먹고 잘 살기 5
잘 먹고 잘 살기 3

이웃집 남자 6

-떨고 있니?
칠레에서 처음으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학회가 끝나고 웬 훌쭉한 청년이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건네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부추겨 다같이 차나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다.

-우연? 인연?
이후 우연히 학교에서 마주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나보다 열 살이 어렸고, 우연하게도 서로 생일이 같았다. 그는 이건 정말 대단한 우연이자 인연이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냐고 강조하면서.

산티아고에서 꼭 가봐야 할 중요한 곳들을 열거해 주길래 열심히 적고 주말마다 그가 말해 준 곳을 "혼자" 잘도 찾아다녔다. (칠레 친구들 왈, 아니 데려가 달라고 해야지 이 바보야!) 그러더니 하루는 오랜 이태리 이민 가족이 운영하는 유명한 피자집으로 날 초대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전공 얘기만 해서 여자애가 싫다고 한 얘기를 비롯한 정말 무지하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후 몇 년간 그를 볼 일이 없었는데 얼마 전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무슨 기관에서 일하다 박사과정에 들어왔다고 한다. 아직도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자기 이제 여자 친구도 있다면서 "나 이제 애기 아니야" 한다.

칠레 친구들, "야, 야, 그거 신호야 신호. 이제 애기 아니니까 잘 해 보자는 거잖아, 야, 야" 난리가 났다.  "여자 친구 있다잖니. 애도 어리고." "어머어머 어리면 좋지 뭘 그래. 너 '흔들기' 몰라?"

흔들기라... 근데 어쩌니, 누나가 너랑 별로 놀 맘이 없어서. 칠레 친구들 왈, "넌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어쩌니..."

이웃집 남자 7
이웃집 남자 5

Tuesday, September 20, 2011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2

(칠레)친구 A의 생일파티였다. A, CG, X, C, 그리고 나, 우리는 요가교실에서 만나 더이상 요가는 하지 않고 1년에 5번 서로의 생일에 초대하는 친구가 되었다. 7살의 연하의 남편과 깨가 쏟아지게 살고 있는 A는 솔로인 X와 나를 시집을 못보내 안달하는 친구다.

-X의 "그"
그런데 A의 생일날 X가 전화기를 붙들고 안절부절했다. 계속 날아드는 문자메시지와 전화에 우리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지 말고 그냥 오라고 해라, 모두의 성화에 드디어 늦게나마 그녀의 남친이 나타났다. A는 원정아 너 이제 어쩔거냐, 반성해라, 이제 너만 남았다, 잔소리를 시작했다.

-정신 사나운 "그"
A는 그래도 친구 남친이 온다는데 이대로는 안된다며 따로 상을 차리고 수선을 떨었다. 그런데 X의 "그"는 들어서자마자 축구얘기, 자기 전 부인얘기(!), 자기 아들 얘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X 얼굴도 어두워지고 우리도 어색했다.

-애꿎은 공격
A와 그녀의 남편이 CG 커플과 아이를 데리고 온 C를 데려다 준다며 잠시 나갔다. 나는 X와 방향이 같아 X의 남친이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기다려야 했기에 집에는 우리 셋이 남았다. 모두가 나가자 갑자기 X의 남친이 나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넌 왜 칠레에 살아? 왜 칠레에 왔어? 언제 왔어? 와서 뭐해?" 낮선 자리에 갈 때마다 둘러쌓여 이런 경우를 당한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라 이제는 적당히 넘기기도 하지만, 그의 태도는 사뭇 공격적이었다. "내가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데, 난 걔들이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일하는지 이해가 안되더라. 지들끼리 모여서 칠레 흉이나 보고 말이야. ..." X가 "원정이는 여기서 잘 지내. 칠레 흉 안봐. (ㅋㅋ 가끔 본다) 밥이나 먹어" 해도 그는 굽히지 않았다. "나는 말이야, 각자 자기 나라에서 사는게 최고라고 생각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도 다른 짓궂은 칠레사람들에게 응대하듯 하고 싶었지만 그는 친구의 남친이었다. 더 대꾸하기 싫어 소파에서 잠이 든 척 했다. "어라, 자나봐? 내가 얘기하는데도 자네?" 잠시 눈을 뜨면 어느새 알아보고 계속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했다


잠시 후 돌아온 A 내외가 돌아와서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나는 X의 남친의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는 축구얘기, 자기 전 부인얘기(!), 자기 아들 얘기, 그리고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후에 전후사정을 들은 A는 아니 걔는 어디서 그런 놈을 골라왔냐고 분개했다.

얼마 후 내 생일에 X는 남친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말이 좀 많아서 말이야"라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 C 생일에 드디어 X가 "끝냈어. 너무 시끄러워서"라고 했을 때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우리나라 남의 나라
이제는 방학에 한국에 다녀와도 칠레가 낯설지 않고 (오히려 한국이 낯설 때가 더 많고) 칠레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집에 왔다'는 안도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왜 남의 나라에 사냐는 공격을 받을 때 여기가 왜 남의 나라냐고 말할 수 없고, 대한민국여권을 칠레여권으로 바꿀 맘이 없는 걸 보면 여기가 우리나라가 아닌건 아닌거다.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3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1

Monday, September 19, 2011

그들의 도전 3

-와사비와 고추장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아시아학디플롬과정 학생들이 한국식당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칠레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좋은 한인촌 XXX 식당에서 모였다. 다들 한국음식을 처음 먹어보지만 칠레에서 유행하는 '스시'와 비슷한 것이겠거니 하고들 왔다. 불고기를 상추쌈에 싸먹는 "놀이"를 다들 재미있어 했다. "어? 이건 와사비에 찍어 먹는게 아니야? 이 빨간 소스 (고추장)에 찍어 먹으라고?"

-먹을 수 있는 음식
차를 가지고 온 학생 한 명이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을 태워주었다. "야, 냄새 엄청나다. 집에 가면 난리 나겠는걸" "우리 남친이 마늘 냄새 난다고 다른 방에서 자라고 하면 어쩌지?" .... 왁자지껄한 가운데 M의 남편이 전화를 했다. M 왈, "걱정하지마 여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더라구"

-다시는 안 간다고?
M은 한국식당나들이의 주동인물이었다. 내 기분은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을까?라고 원망하기에는 너무 괜찮은 그녀였다. 얼마전 그녀를 만났는데 남편과 함께 한국식당에 갔다고 한다. 온 몸과 옷에 고기냄새+마늘냄새+기타등등이 베어 "다시는 안갈거"라고 했다. 흠.. 다시는 안 간다... 다음에 그녀를 만나면 한국식당에 갔는데 다시는 뭘 안할거라고 말할지 자못 기대가 된다.

그들의 도전 4
그들의 도전 2

이웃집 남자 5

-이름 없는 메일

칠레에 처음 와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닐 때 무료 특강을 많이 했었다. 어느 학교에서 무료 특강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자기 소개는 없었고, 내 특강을 들은 사람이라고만 했다.

-신비한 "그"
6개월 이상 메일이 왔다. 첫 메일을 받았을 때에는 특강에 관심가져 주어 고맙다, 그런데 어디에서 일하는 누구냐고 묻는 답을 보냈는데, 내 질문에는 답이 없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메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뛰어난 어휘와 문장 구사력이었다. 나는 아직도 세세하고 미묘한 감정표현을 스페인어로 다 할 수 없어 답답할 때가 많은데, 아, 이런 형용사가 있었구나, 아, 이런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뛰어난 문장이었다. 답장도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사전을 찾아가며 메일을 읽었다. 칠레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형용사, 부사, 속담 등등... 그런데 별로 답장을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메일을 보내면서 절대로 자기 소개는 하지 않았다.

-무서운 "그"
2-3개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긴 메일을 읽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는 자기 소개도 하지 않으면서 꼭 만나고 싶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만나면 안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6개월이 지나자 더이상 메일은 오지 않았다. 이제 지쳤군 하고 말았다.

메일이 끊기고 1년 쯤 지나서였다. 누군가 계속 MSN으로 친구 신청을 했다. 잘 모르는 이름이어서 '거절'을 눌러도 줄기차게 친구 신청을 했다.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아! 했다. 바로 "신비하고 무서운 그"였다.

친구신청을 받아주지 않자 "답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얘기만 들어"달라며 이러저런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더니 "내 말에 끝까지 답을 안하는군. 답 좀 하지" 했다가 "그냥 듣기만 해"했다가... 

-비슷한 "그"
(칠레)친구와 쇼핑몰에 갔는데 어느날 친구가 그 날 자기가 아는 사람이 몰에서 나를 보고 자기더러 날 소개해달라고 졸라댄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했더니 "여기서 교수하는 동양여자가 몇 명이나 되겠어. 네가 어디서 무슨 일 하는지, 언제 어느 학회에 갔는지까지 다 꿰고 있던걸" 한다. Oh, my God! 메일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은 아닌 것 같았지만, 너무 무서웠다. 친구가 그 얘기를 꺼낸지 1년도 더 지나서 "얘, 그 사람은 아직도 나만 보면 졸라댄다"고 했다.

-사랑인가 집착인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칠레에 도착해 매년 국적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어봤다는 멕시코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어찌나 집착이 심한지 칠레남자친구랑 헤어질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었다. 한 번 마주친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1년 이상 조르는 건 집착아니냐는 내 말에 칠레친구는 왜 사랑을 무시하느냐고 했다. 사랑인가, 집착인가, 글쎄 어찌되었든 신비하고 무서운 "그들"의 마음은 내게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 남자 6
이웃집 남자 4

Sunday, September 18, 2011

이웃집 남자 4

몇년 전 칠레 북쪽 San Pedro de Atacama 사막에 갔을 때다. Calama 시내거리에 늘어선 여행사 중 한 곳이 다른 여행사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여행지를 내걸었기에 들어가보았다. 일명 무지개계곡 (Valle de Arco Iris) 여행이라고 했다. 주위에 워낙 유명한 곳이 많아 아직까지 잘 알려진 곳은 아닌데 여행사 주인이 워낙 좋아하는 곳이라나. 호기심에 이름을 적었다. 내 위로 두 명이 등록되어 있었고, 둘 다 독일식 이름이었다.

다음날 아침 같이 여행할 팀을 만났다. 우리를 안내해 줄 기사아저씨는 아르헨티나 투쿠만 출신, 독일인 부자 중 아버지는 페루에 있는 독일학교에서 10년 넘게 일하신 분, 아들은 영국의 모 대학 사회학과 교수, 피노체트 시절 스웨덴으로 망명을 간 칠레 교포 2세, 그리고 나. 우리는 완벽한 multinational, multi-intercultural 그룹이었다.

일행 전원이 자기 나라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 얘기가 많았고 우리는 금새 친해졌다. 그 중에서도 나와 독일인 아들은 이상하리만큼  죽이 잘 맞았다. 우리는 차에 타면서부터 Valle de Arco Iris에 가서도 끝도 없이 얘기를 했다. '난 원래 누가 너무 좋으면 말을 잘 못하는데... 내가 좀 변했나?' 속으로 신기해하면서도 서로 할 얘기는 끝이 없었다.

도시락을 먹고 계곡을 내려오면서 농담삼아 말했다. "어제 여행사에 갔더니 내 이름 위로 독일식 이름 두 개가 보이더라. 남녀커플이면 부부나 연인일거고 둘 다 남자라면 게이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올거라는 생각은 못했네?" "와하하하하하하" 크게 웃더니 그가 말했다. "아버지랑 온 건 맞는데 나는 게이야. 아, 우리 아버지는 게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

이웃집 남자 5
이웃집 남자 3

Saturday, September 17, 2011

잘 먹고 잘 살기 3

-교수님, 배고파요.
많지는 않아도 한국에서 교환학생들이 오면 가끔 우리집에 불러 밥을 먹인다. 고생 모르고 자란 요즘 아이들인지라 처음에는 '김치는 없어요' 하다가, 길에서 사 먹을 것도 참으로 마땅치 않은 칠레살이 한 달만 지나면 '아무 거나 주세요'가 된다.  아이들은 칠레에서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한국사람들이고 아이들 밥 먹일 때 아니면 나는 칠레에서 우리말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나는 그렇게 착하기만 한 선생님은 아니다. 밥 먹고 나면 설겆이도 시키고, 오늘 삼겹살 파티 하니 상추랑 후식 사와라 하기도 한다. (재밌는 드라마나 영화 다운받아오라고 시키기도 한다) 나는 그것도 교육이라고 꿋꿋하게 주장한다.

-교수님, 저희 지금 갑니다.
KB, YJ, YI, H는 아예 우리집에 router를 사다 놓았다. 그리고 계란 한 판, 바나나, super 8 (칠레사람들이 흔하게 먹는 초코바)는 상시 준비. "교수님, 저희 지금 갑니다"하고 전화를 하면 나는 밥만 앉히면 되었다. (가끔은 국도 끓여놓고)  그러면 알아서 밥 먹고 설겆이 하고 공부하다 가고들 했다. 그 해엔 유달리 학회 발표가 많았는데, 파릇파릇한 애들이 옆에서 공부를 하니 나도 그 기운을 받았는지 애들이 밤샐 때 나도 밤새워가며 한 학기에 페이퍼 3개를 무사히 쓸 수 있었다. 그 뿐인가, 행정병 출신 KB의 능숙한 컴퓨터 솜씨로 제1회 한국학논문대회 포스터가 탄생하기도 했다.

-인생은 아름다워
이제는 다들 졸업을 하고 건실한 사회인들이 되었다. 심지어 칠레에 출장도 온다. 그러나 출장 차 칠레에 오면 자유시간도 없고 일정이 빠듯해서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다. 출장 왔다고 찾아온 양복 입은 H를 보니 어찌나 신기하던지. "교수님 저 회식 마치고 술에 좀 취했지만 꼭 뵙고 싶어요. 내일 바로 귀국합니다"하고는 오밤중에 장미꽃을 사들고 왔다.  도저히 개인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던 KB는 "교수님 안주무시면 꼭 찾아뵙고 싶습니다" 하며 와서는 나 주려고 챙겨왔다며 아이폰을 건네주었다. "이거 못 드리고 갈까봐 걱정했어요." 한다.

아이들은 계란 후라이에 밥 비벼 먹고 내가 건네준 김홍도, 신윤복 그림 이리저리 조합해가며 자기들이 만든 제1회 한국학논문대회 포스터를 아직도 기억했다. 올해로 그 대회가 제5회를 맞이했고, 이제는 디자이너가 포스터를 만들어주고, 수상작들을 모아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니 하니 나보다도 더 기뻐했다.

-Thank God
나는 내가 누군가를 불러 밥을 해먹일 수 있다는게 무한히 감사하다. 내가 칠레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해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잘 먹고 잘 살기 4
잘 먹고 잘 살기 2

Friday, September 16, 2011

그들의 도전 2

(칠레친구) C는 파전, 생선전 등 전과 부침개 종류를 다 잘 먹는다. 내 생일에 집으로 초대해서 해물을 넣고 부침개를 해주었더니 "이거야 이거야" 하면서 잘도 먹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김치마저도 잘 먹는 C의 남편은 해물을 안먹는다나!!

욕심많은 C는 자기도 부침개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언제 자기 집에 와서 요리 강습을 해달라고 했다. (아이고.. 내가 남의 집에 가서 요리 강습할 정신적/시간적/신체적 역량은 도무지 부족하다!) "야, 그냥 우리 집에 와서 먹어" "야, 너 한국학 교수잖아. 이런 것도 해야 해" "야, 수업하는 걸로 충분해" "아니야, 아니야, 너 와서 이거 꼭 가르쳐줘야해" "싫다니까" "알았지? 알았지?"

더 들볶이기 전에 도망갈 구멍을 만들자! 다음에 C 집에 갈 때 부침가루를 선물했다. 밀가루랑 섞어 해도 되고, 부침가루로만 해도 되고, 어쩌고 저쩌고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같이 만들어보자고 성화를 하는데 "다음에~~" "어쨌든 고마워 고마워" C는 자기가 다음에 부침개를 만들어 초대할테니 "두고 보라"고 큰 소리를 쳤다.

어느 토요일 C가 전화를 하고 어서 자기 집에 오라고 했다. C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갑자기 부엌에서 C가 나를 불렀다. 세상에! C의 도우미아줌마가 (칠레에서는 도우미 아줌마를 두는 일이 흔하다) 부침개 반죽을 만들고 있었다. 아줌마는 이 정도면 되나요 물어봐가면서 반죽을 만들고 C는 원정이가 만든 부침개에는 무슨 무슨 야채를 어떻게 썰어 넣었더라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완성된 아줌마표 부침개. 충격적일만큼 맛있다! 칠레 친구집에서 칠레 아줌마가 만든 부침개를 먹는 기분이 아주 묘했다. C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침개를 간장에 푹푹 담가 맛있게 드셨다. (칠레사람들은 스시도 간장에 거의 잠수시켜 먹는다) C 왈, "너 다음에는 한국 간장도 가지고 와, 알았지?"

그들의 도전 3
그들의 도전 1

못난이의 도전 4


-자선파티
오랫만에 영어모임에 갔더니 South Africa 아줌마가 자선파티에 오지 않겠냐고 했다. 칠레 산티아고에는 영어권 사람들을 위한 영어라디오방송이 하나 있는데 라디오 DJ가 사회를 보고 기부금도 만 페소 (우리돈 2만원 정도) 라고 하기에 가겠노라고 했다. 아줌마는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모자"를 쓰고 와야 한다고 했다. 잘 만든 모자에는 상품도 있다고 했다. 뭐 별거 있겠어, 그냥 cap에 색색가지 리본이나 달고 갈까? 아니면 맥주 깡통? 궁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메일로 초청장을 받아 보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초청장에는 전년도 모자 수상자의 사진이 있었는데 이건 거의 예술이었다. 다른 모자 사진들도 보니 어찌나 재밌고 창의적인 모자들이 많던지 자칫 cap에 리본 달고 갔다가는 망신만 당할 것 같았다.

-우연한 선물
그 무렵 아는 분 내외가 저녁 초대를 하셨다. 시내에서 파티용품전문점을 하시는 분들이었다. 마침 주말에 "자기가 만든 모자" 파티에 가야 한다고 하니 사모님께서 가게에서 팔다 남은 리본, 끈 등 여러 가지를 챙겨주셨다.  오밤중에 거울을 보고 커다란 망을 이리 둘러 보고 저리 둘러 보고 혼자 놀기를 시작하다 얼추 중세시대 풍 모자를 만들었다.

-내가 만든 모자
파티 장소에 도착하니 모자를 쓰고 입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입장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다. 동양인은 나 혼자였고 그룹으로 온 사람들은 테이블 하나씩을 차지하고 먹을 것도 준비해온 게 보였다. 나처럼 개별적으로 온 사람들만 모아 놓은 제일 뒤 테이블에 '내가 만든 모자"를 쓰고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자선파티였다. 산티아고 영어라디오방송 DJ의 사회로 게임, 경매 등이 이어졌다. 내 옆자리에는 전직 칠레주재 남아프리카 대사 내외가 앉았다. 직접 만들어 온 스콘도 너무 맛있었다. 혼자 간 동양인만 아니라면 완벽하게 재미있는 파티였다.

-Table Number 14!
행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사회자가 그 동안 행사 주최자들이 모자 심사를 했노라고 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전직 대사 사모님이 "아마 네 모자가 1등일거야. 이렇게 특이한 모자는 없으니까."라고 했다. 어느 미국 할아버지의 모자가 3등, 땡땡이 무늬 천으로 만든 바이킹 모자를 쓴 어떤 아저씨가 2등을 했다. 사회자가 올해의 1등은 (두구두구두구두구...) 하더니 Table Number 14!하고 외쳤고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 테이블을 쳐다봤다.

-초콜렛 500g
우리 테이블이 제일 뒤에 있었던 터라 상 받으러 앞으로 걸어 나가는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고 좋기도 하고 챙피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이 날 받은 1등 상품은 칠레 유명 초콜렛 500그램 들이 한 상자!

상품으로 받은 초콜렛을 학교에 가지고 가서 내가 모자대회에서 1등한 상품이라고 비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다음해 초청장에는 전년도 1등 수상자인 내 사진이 실렸다. 그러나 또한번 유일한 동양인이 되기는 좀 머쓱하고 같이 갈 사람도 마땅치 않아서 가지 않았다. 

-재미있는 자선파티
이후에 모자파티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는 그게 자선파티였다는 걸 거의 잊어버리고 지냈다는 걸 깨달았다. 봉사도 재미있게, 티나지 않는 자선파티. 정말 멋진 일이다.


Wednesday, September 14, 2011

못난이의 도전 3

- 달콤한 유혹
3년간 일본에 교환교수로 가신 적이 있는 노교수님 M이 같이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제안하셨다. 여자분이고 종종 당신 집에 초대해서 칠레 문화도 가르쳐주시는 분인데다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였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새로운 과목을 개설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세계화에 걸맞는 interdisciplinary한 주제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칠레 교수와 칠레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교수가 강의하는 Intercultural Communication between Asia and Latin America, 완벽한 프로젝트였다.

- 유혹의 함정
프로젝트를 땄다. 첫 학기는 준비 기간, 두번째 학기에 실제로 수업을 개설해 강의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업실러부스를 준비하며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아침 10시에 연구실에서 모이면 한 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잠시 후 당신이 좋아하는 샐러드와 과일을 같이! 사러 가고, 일 얘기를 아주 약간 하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하루 종일 같이 일하는게 그 분이 생각하는 "동양식 협력"이었다. 각자 집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을 이메일로 교환하고 모여서 수정하는게 어떻겠냐고 하자 "NO!, 그건 협력이 아니야."

-꿈꾸는 자의 자유
M 교수님은 아디이어가 넘치는 분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착륙을 못한다는 것. 하루는 중동과 구소련 지역까지 다 포괄하는 의욕 넘치는 실러부스를 제안하길래, 난 한/중/일에서 멈추겠다, 중동과 -탄, -탄 국가들은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라고 했다. "좋아, 그럼 인도까지만 넣자"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 무렵이 되면 "오.. 난 이 실러부스가 너무 맘에 들어. 내가 꽃이 된 것 같아." 했다가 다음 날이 되면 "다 고치자"를 몇 주를 반복했다. 16주 수업이니 각자 8주씩 준비하자고 하니 "우리는 팀이니까 매 수업 시간을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게 그 분 주장이었다. 그 분의 그런 성격 때문에 칠레교수들이 같이 일하기를 꺼려한다는걸 안 건 나중 일이었다.

-NO
우여 곡절 끝에 실러부스를 준비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은 M교수님이, 한 시간은 내가 하기로 했는데, 매 번 지난 번에 자기가 할 얘기를 다 못했으니 잠깐만 하면서 수업의 반 이상을 채가기가 일쑤였다. 겨우 내 차례가 되어 수업을 할라치면 내가 하는 말마다 학생들 앞에서 NO 라고 소리쳤다. 학생들 앞에서 교수 둘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고 난감했다. 수업 조교는 내 연구프로젝트 조교를 하던 N이었는데, 하루는 N이 M 교수님이 내 모든 프로젝트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고 걱정했다.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꼭 같이 점심을 먹어야 하고 수업에 대해 review해야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학기가 시작하고 두 달 이상 나는 수업 전날이면 잠이 잘 오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면 "어제는 M이 말이야"하고 얘기를 시작하니 나중에는 친구들도 나를 보면 "어제는 그 할망구가 뭐라고 하던?" 할 정도였다.

-이건 아니다
M 교수님이 학회 참석차 잠시 자리를 비운 일주일 동안 처음으로 수업 같은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발표하기로 한 case study에도 진척이 있었다. 그러나 M 교수는 돌아오자마자 "네가 뭔데 네 맘대로..."로 시작하여 나를 학생 다루듯 다그치기 시작했다. 조교 N이 "칠레에선 칠레식대로 하세요. 노인을 존중해주는 것만이 다가 아니에요"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다. 난 이미 제대로 수업도 못하고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어느날 M 교수가 우리 이 테마로 같이 연구프로젝트를 내보자고 하기에 "전 못하겠어요. 그리고 이 수업에서도 빠지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지 마
M 교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이게 얼마나 흥미로운 프로젝트인지 알지? 학교에서도 아주 관심있어 한다구. 학장도 도와줄거야." "아, 그럼 당신 혼자 해요. 난 안하겠어요." 그러자 M은 태도를 바꾸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니. 내가 혹시 너한테 뭐 잘못한거라도 있니?" "네, 아주 많죠." 그리고 실러부스와 계획표에 나온 대로 한번도 수업을 한 적이 없다는 점, M 교수 차례에 해당 주제를 벗어난 얘기만 한 점, 매번 내 수업의 반 이상을 앗아간 점, 학생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준 점 등을 줄줄이 읊었다. M 교수는 부들부들 떨었다. "너 어떻게 동양애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동양에서는 노인을 공경하라고 가르치잖아. 너 아주 못배워먹었구나."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동양에선 나이 어린 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듯, 윗사람도 아랫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라고 가르치죠." 그 후 나머지 두 달간 드디어 우리는 실러부스에 맞추어 제대로 된 수업을 할 수 있었고 나도 어느 정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옹지마
어려운 한 학기를 "참자, 참자, 이력서에 영어로 강의했다는 흔적이나 남기자, 참자"고 다짐하며 버텼다. 그리고 지금은 M 교수님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고마워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마주치면 피하고 싶다. 도가 부족한거다.) M 교수님이 최종보고서를 안 냈다고 본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세상에, 나를 공동연구원으로 넣었다더니만 알고보니 collaborator로 넣어서 난 보고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워낙 정보에 빠른 M인지라 다문화와 관련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자고 날 들들 볶아서 내가 조직해서 이끌고 있는 동아리 Study Group ASIA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를 발표했는데 이틀간 진행된 수십 개의 발표원고 중 내 페이퍼가 뽑혀서 책에 실렸다. M에게 무시당하기 싫어 한 학기 내내 영어방송을 틀어 놓고 살았고, 문화, intercultural communication과 관련된 책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던 M의 아이디어를 잘 착륙시켜 꾸미면 몇년 치 프로젝트는 거뜬히 나올 정도다.

-너 자신을 알라
M 교수님과 강의하면서 나 자신이 외국인교수와 communication이 안되면서 내가 어떻게 intercultural communication을 가르칠 수 있는가 수도 없이 자책하고 고뇌했다. 그래서 이후 내 연구의 주된 주제가 intercultural communication, 그리고 비교문화가 되었으니 난 M 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못난이의 도전 4
못난이의 도전 2

Monday, September 12, 2011

이웃집 남자 3

쿵, 쿵, 쿵, 쿵...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터미네이터가 내던 발걸음이 들렸다. 안경이나 렌즈 없이는 반 장님인 눈으로 커튼 사이에서 춤을 추는 빌딩들이 보였다. 한국에 다녀와서 거의 일주일을 낮에는 볼 일 보느라 못자고 밤에는 시차 때문에 못자서 내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했다.

밖에서 누가 "문 열어, 문 열어" 하며 문을 두드렸다. 어떤 술취한 놈이 자기 집도 못찾아가고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군. 그런데 계속 소리를 지른다. 내가 술이 취했나 땅바닥이 왜 자꾸 움직여 하면서 주섬 주섬 옷을 갈아 입는데 마루에서 뭔가 쨍그랑 소리가 들리고 거실에 달아 놓은 종이 땡땡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게 뭐지... 대문을 열려고 하니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문이 안 열려요" 울먹거리니 문 손잡이를 내리고 있으라고 한다. 하나, 둘, 셋, 밖에서 문을 밀자 그제서야 대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 이제 어떻게 해요?" 하려고 보니 우리집 문 두드려주던 사람은 앞집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2010년 2월 27일 새벽 3시 반, 칠레에 20년 만에 강진이 닥친 날이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대로 문틀을 잡고 있자니 잠시 후 지진이 멈췄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데 다행히 경비실에 인터폰은 할 수 있었다. 지진이 멈췄으니 일단 집을 비우라고 한다. 혹시 어디서 가스가 터지거나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기도 안들어오고 렌턴도 없고.. 어떻게 내려가지 하고 있는데 다른 이웃남이 오더니 같이 내려갈래? 한다. 옆집에 살던 스페인 여자애도 나온다. 남편이 하필 지금 출장 중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안보이는 13층 계단을 이웃남 등짝만 쳐다보며 내려갔다.  잠시 후 경비실에서 이제 올라가도 된다고 한다. 아.. 어두운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지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같이 올라갈래?" 한다. "응, 그런데 넌 몇 층까지 가는데?" "너 아까 나랑 같이 내려왔잖아."

지진 이후 두 주 동안 가스와 더운물이 끊겼고, 다행히 전기는 들어왔지만 불안정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슈퍼에 다녀왔는데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전기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같이 타고 있던 이웃남은 잽싸게 전 층을 모두 눌렀다. 경비실에서 아무 층이나 엘리베이터가 서면 내리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3층인가에서 내렸다.

일주일 치 장을 본 봉투를 양 손에 들고 거기서 13층까지 어찌 올라가야 난감하던 차에 엘리베이터 이웃남이 자기가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런 고마울데가.

여진도 잦아들고 마음도 가라 앉자 갑자기 고마운 이웃남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난 아파트에서 한 번도 그들을 본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혼자 지내는걸 알지? 그러나 내 얘기를 들은 칠레친구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어떻게 했어? 누가 제일 괜찮았어?" 한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걸." "얘, 너 바보 아니니? 어차피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될거 아니야. 고맙다고 커피라도 같이 마시러 가자고 하던지, 봉투를 집까지 들어다줬으면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해야지 시시하게 뭐야."

그래, 나 시시하다. 무섭다고 말했더니 같이 걱정은 안해주고 나쁜 지지배들. 혼자 씩씩대긴 했으나, 그렇다, 난 역시 작업정신이 철저하게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웃집 남자 4
이웃집 남자 2

못난이의 도전 2

한국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의 일이다. 중급반에 다니던 일본학생의 일기를 검사하다보니  "어젯밤에 양념치킨을 먹었어요. 감동했어요."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일본학생들이 "감동"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에 일본어에서 "감동"이라는 한자의 쓰임이 우리말과는 다른가보다 했지만,  양념치킨을 먹고 감동이라... "양념치킨을 먹고 감동했어요 보다는 다른 말을 생각해보세요"라고 표시해주었다. 다음날 그 학생은 이런 일기를 썼다. "양념 치킨을 먹고 흥분했어요." 그 학생이 생각하는 '기분이 좋다'가 아마도 사전 정의 1번 감동, 2번은 흥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감동'과 '흥분'에 대해 생각하며 내가 하는 영어와 스페인어도 이와 비슷한 모양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전에서 찾은 단어로 문법에 맞게 쓴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말투'와 '문장의 모양새'가 주는 느낌까지 완벽하게 터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칠레에서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페인어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멋모르고 말하고 쓸 때에는 겁이라도 없었거늘 어중간하게 아니 더 조심스럽기만 하다. 스페인어로 쓴 페이퍼를 고쳐주는 칠레 친구들은 전에는 문법만 맞으면 대충 봐주더니 요새는 말그대로 가차없이 빨간펜을 날린다. 외국인이 어쩜 이렇게 스페인어를 잘 하냐던 감탄은 초기 시절 얘기다. 요새는 아직도 그걸 모르냐고 야단 맞기 일쑤다. 페이퍼를 써야 한다거나 간단한 인사말을 해야 한다거나 할 때에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혼자 하지 말고"라고 교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걸 각인시켜준다. 교수회의라도 하고 난 날엔 기가 죽고 화가 난다. 친구들은 이 단어 보다는 저 단어가 더 고급스럽고 (내가 보기엔 똑같구먼) 이런 표현을 쓰면 싼티가 나고 (그거나 그거나) 이 문장은 이런 식으로 써야지 이게 무슨 말이냐 (왜 못 알아 듣냐고!).. 나는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도 친구들의 빨간펜이 너무나 고맙다.

한동안 한국어와 어줍잖은 영어로 페이퍼를 쓰느라 교정 봐달라는 부탁을 안했더니 친구가 "너 요새 공부 안하니? 아니면 내가 교정 봐준게 맘에 안들어?" 라고 메일을 보냈다. 뜨끔뜨끔. 그러지 않아도 이번에는 스페인어로 페이퍼를 써야 할 차례다.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써야 한다!

못난이의 도전 3
못난이의 도전 1

잘 먹고 잘 살기 2

"김치"는 나의 칠레살이의 영원한 딜레마다.  김치 없이 밥을 먹으면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고, 한국식 김치를 집에 두면 냄새가 넓지도 않은 집 전체는 물론 옷이며 물건에 스며들어 난감하다. 한인촌에서 파는 김치는 가격도 비싸고 내 입맛에는 너무 맵다.

내 식대로 김치를 담가볼까? 그런데 칠레슈퍼마켓에 일명 '중국배추'라고 하는 배추가 보이긴 하는데 아주 가끔 보일 뿐이고 무는 조선무보다 가늘고 작고 바람든 무같다. 한인촌에는 한국식 배추와 무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걸 혼자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 칠레에선 칠레식대로. 슈퍼마켓에 보이는 온갖 종류의 양배추와 상추를 응용해보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큰 통에 담긴 마늘가루를 보내주었다. 집에서 마늘을 다지면 파생될 충격파를 잘 아는 "외국살이동지"의 배려였다. 고춧가루와 까나리액젓 하나 쯤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생강가루, 양파가루, 각종 가루와 상추, 가끔은 오이를 곁들여, 그렇게 각종 김치샐러드가 탄생했다.

미국 교수님  내외분을 집에 초대했다. 한국인 사모님을 두신 덕에 교수님 또한 한국 음식을 잘 드셨다. 내 맘대로 김치를 보신 사모님, "어머, 이런 신기한 김치도 있네?", 내 맘대로 김치를 맛보신 사모님, "와, 먹을만해!!"

잘 먹고 잘 살기 3
잘 먹고 잘 살기 1

Saturday, September 10, 2011

산티아고종교탐방사 3

안수 - 티벳어 할 줄 아니?
불교 아니어도 불상수집
올라야 - 요가, 명상, 깨달음
마리아 - 공자의 한 구절
아구스틴 - 삼고초려
티벳대표단방문쇼 - 안수에게 묵주 선물
성당
49재 미사
조한광 선배 장례 미사 - 곡
집단기도 - 칠레사람들이 너무나 이상해 하는
일요일이라는 단어는 없다
정과장님은 신심이 깊으세요
다들 교회들을 안다녀서 이혼을 해요
민경이가 다니던 교회 - 장공사님이 소개해주신 교회는 너무 점잖고, 미국 교환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가 밝고 한국교회와 분위기가 비슷. 모두 영어로 예배를 봄.
독일사람들이 다니는 루터교회

그들의 도전 1

(칠레) 친구 C는 호기심이 많다. 독점욕도 강하고 모든 일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린다. 하다못해 같이 점심을 먹을 때에도 다른 친구들이 여기 가자고 먼저 말하면 저기로 가자고 바꿔줘야 직성이 풀릴 정도다. 아마 C가 한국친구였다면 많이 부딪쳤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녀보다 스페인어도 못하고 칠레도 잘 모르는 나는 그냥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뿐이다.

C와 C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 한국식당에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 부분에서만은 C도 장소는 나더러 정하라고 했다. 메뉴도 알아서 하라고 했다. 다들 어떤 것은 맛있고 어떤 것은 이상하고 품평을 하며 먹는 동안 C의 남편은 처음 먹어 보는 김치에 밥을 비벼 먹었다.  부지런히 메뉴를 들여다보고 그 날 먹은 메뉴를 적던 C는 다음에는 혼자서도 올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나는  매워보이는 음식은 안매운 음식과 함께 시켜 같이 먹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C가 남편과 함께 우리가 같던 한국식당에 가서 김치팬케잌 (부침개)를 먹고 그날 밤 응급실에 갔다고 했다. 남편에게조차 지기 싫어하는 C였으니 김치를 잘 먹는 남편보다 뭔가 새로운 걸 더 잘 먹는다는 걸 보여주고는 싶고, 그래서 시킨게 김치부침개였는데 한 접시를 혼자 다 먹었다는 거다.

불굴의 C는 그래도 한국음식 먹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요즘도 우리는 가끔 분위기도 쇄신할겸 한국식당에 간다. 그러나 C는 이제는 더 매운 음식도 곧잘 먹으면서 김치부침개는 되도록 (그녀 버전), 아니 절대로 (친구들 버전) 시키지 않는다. 물론, 한국식당에 갈 때만은 그녀의 올곧은 독점욕도 아주 잠깐 포기해준다. 그러나 내가 많이 힘들어 보일 때에는 친구들이 다른 곳에 가자고 해도 꼭! 한국식당에 가자고 우겨댄다. 사실 나는 외식을 별로 즐기지 않고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한국식당 음식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한국이 그리워서 힘들어 하나 걱정해주는 C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녀의 순종적인 친구이기를 자처한다.

그들의 도전 2
초보자를 위한 스페인어 1

이웃집 남자 2

SIEMENS 상표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만난 건 칠레 남부에 있는 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하던 중이었다. 칠레에 잠시 연수 차 와 있던 D와 E와 나는 맘이 잘 맞아 자주 어울리곤 했는데 어느날 죽이 맞아 가자! 를 결정했다.

우리는 정말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살인적인 스케쥴을 감행했다. 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을 돌아보는 방법은 일명 W봉이라고 불리우는 세 개의 봉우리를 하나하나 점령!하는 방법과 버스나 차 등 교통수단을 이용해 W 봉 주위를 빙 돌아보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세 개의 봉우리 중 마지막 빙하를 제외한 두 개의 봉우리 점령작전을 짰다.

아침 7시 기상, 8시 출발,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4시간 내 고지 점령, 다시 4시간 내에 내려와 배를 타고 이동, 저녁을 먹고 취침(이라기 보다는 기절), 다시 아침 7시 기상, 8시 출발, 다시 4시간 내 고지 점령, 4시간 내 하강하여 배를 타고 돌아감.. 이 일정대로 움직여야 우리는 산티아고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난 그제서야 아.... 이 곳은 이렇게 급한 마음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듯이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게다가 제대로 트레킹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뿐이었다. 유럽사람들은 모든 장비를 갖추고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여유있는, 진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우리 뿐이었다. 여행을 마치면 곧 한국에 돌아가야 할 D와 E는 얼른 보고 싶어 마음이 급했지만 이틀째가 되자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틀째 오를 봉우리로 가는 길은 평평한 돌길이었다. 길이 하도 평평해서 봉우리는 바로 옆에 보이는데 가도가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날의 피로와 "다음에 또 와야지" 하는 풀어진 마음이 얽히면서 다리에 쥐가 났다. 내 속도가 자꾸 느려지면서 D와 E의 불편한 표정도 읽혔다. 시간이 지체되면 배를 놓치고 그러면 비행기도 놓치고... 미안한 마음과 아픈 다리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나는 지금부터 천천히 내려가고 있을테니 올라갔다 오라고 했다. 절뚝절뚝 하는 꼴이었으니 그때부터 내려가기 시작해도 이들은 날 금새 따라올 판이었다.

앉으면 일어날 수가 없어서 다리가 아파도 그냥 걸어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엉금엉금 내려가던 중 "그"를 만났다. 우리와 같이 출발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사람이었다. 일행은 어디 가고 혼자 내려가냐길래 몸이 안좋아서 먼저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올라갈 때 가장 난관이었던 그야말로 돌 밖에 없는 길 앞에 그나마 쉴 만한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바위 투성이인데 어떻게 내려가나 앞이 막막해서 바위에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영화처럼 누군가 앞에 멈춰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였다. 올라가다가 그냥 내려왔다고 했다.

"넌 일본사람이니?" "아니, 한국. 너는?"
"난 독일에서 왔어.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 무언가 말을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독일식 영어를 알아 듣고 작문해가며 말을 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다. 전에 SIEMENS에서 일할 때 아시아에 출장을 자주 갔었다고도 하고 몇년 전에 이 곳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단체 관광이라 버스를 타고 주위만 둘러보고 가서 W 봉을 점령해보려고 다시 왔다고 했다.

나는 고개만 숙이고 있고 "그"는 혼자 얘기만 하다가 내려가야겠다고 했다. 그제서야 "나 좀 데리고 내려가달라"고 했다. 몇 시에 배를 타야 하는데 나 때문에 늦어질까봐 미리 내려온건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되고 어느어느 지점까지만 내려가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거기까지만 가게 도와달라고 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많이 놀랐다. 난 누구를 쉽게 좋아하는 성격이 못된다. 그리고 내 인생에 다시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건 다 남의 일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보다고 돌려버렸다. 게다가 내 꼴이 말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나한테 관심이나 있겠나 싶었다.

"그"는 몇발짝 앞서 걷다가도 내가 비틀거리면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내가 그리워하는게 이런거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더 말이 안나왔다.  "넌 언제 한국에 가"냐길래 "저 친구들은 다음 주에 가는데 난 여기 살아"하자 갑자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에서 일한다는 말을 그때 했어야 했나보다 싶다.)

바위구역을 다 지나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지점에 이르렀다. 거기서 무언가 한참이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가 지도를 들고 내 옆에 왔는데 너무 떨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난 번 루트는 이러이러했고 이번 루트는 이러이러하고.. 그러다 과자를 먹으라고 주기도 하고.. 그러다 또 얘기도 하고.. 내 대답은 아, 응, 이 다고.. 뭐 그랬다. 남미 여행을 하고 싶어 몇 년 전에는 한 달 휴가를 받아 스페인에 가서 스페인어를 배웠고, 어쩌고 저쩌고, 지금은 SIEMENS에서 분리독립한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독일식 회사 이름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갈 방향이 달랐다. 나는 친구들이 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그"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다. 그제서야 서로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베낭을 매고 몇발짝 걸었을 때에서야 나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내가 바위구역 앞에서 거의 울며 기다릴 거라 예상했던 D와 E는 내가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그런데 그들에 따르면 내가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더라나) 어떻게 거기를 혼자 내려왔냐길래 아까 우리가 오가며 만났던 사람이 도와주었다고 하자 갑자기 D가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D에 따르면, 같은 남자의 눈과 직감으로 "그"는 처음부터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내 꼴을 봐"라고 항변하자, 몇년 전에 왔던 곳에 봉우리 점령하러 다시 왔던 사람이 올라가던 길을 다시 내려왔지 않냐고 더 야단을 쳤다. "그"가 뭐라고 묻더냐, 교수님은 뭐라고 답했냐, 거봐라 그렇게 짧게 대답하면 어쩌냐.. 난 어린 D한테서 유치원생같이 야단을 맞았다. 옆에 있던 E는 그 사람 너무 괜찮던데 하며 더 속을 긁었다. 그 사람을 그냥 보냈냐길래 연락처도 안묻던데? 했더니 "아니 그 따위로 대답을 하는데 뭐하게 묻겠냐"고 D와 E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산티아고에 돌아와서 D와 E가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둘은 매일같이 나를 놀렸다. 매일 공항에 나가서 Rolf를 찾아보라는 둥, 다음부터는 한국에 갈 때 꼭 독일을 경유하라는 둥... ㅠㅠㅠ

칠레에서 친하게 지내던 미국친구에게 skype으로 전화를 걸고 내 억울한 마음을 호소했더니만 "잤어?"한다. "야, 산에서 잠깐 만난 사람이랑 뭘 자" "얘는, 걔가 지네 나라 돌아가려면 어차피 산티아고에 와야 하잖아" "야, 그래서 뭘 어쩌라고" "답답하기는. 정말 좋으면 지가 칠레로 오겠지." "걔가 칠레에 와서 뭐해" "아 거 참, 유럽애가 스페인어까지 하는데 지 밥벌이 하나 못찾겠니?"

누군가는 나더러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이랑 뭘 어쩌겠냐고, 잘했다고 해주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맞아, 엄마라면 외국남자랑 뭘 어쩔거냐고, 여행지에서 만난 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함부로 만나냐며 잘했다고 해주실 것 같았다. 그 다음 달 한국에 갔을 때 "엄마, 내가 재밌는 얘기 해드릴게" 하며 말씀을 드렸다. 가만히 들으시기만 하시던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연락처도 안묻고 그냥 보냈니?"

이웃집 남자 3
이웃집 남자 1

잘 먹고 잘 살기 1

내가 산티아고 한인촌에 가는 경우는 간장/된장/고추장이 떨어졌을 때, 그리고 약속이 있을 때 뿐이다. 지하철을 갈아 타고 가야 하는 것도 불편하고, 간단한 반찬이야 내가 대충 해먹으면 되고, 어차피 집에서는 냄새 걱정에 김치도 안먹고, 워낙 맵고 짠 음식을 잘 못 먹고, 게다가 한국가격의 딱 2배를 받는 한인촌 가격에 굳이 한국과자를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

어쩌다 한인촌에 가면 그 기회를 이용해 당면, 두부, 묵 등을 사오곤 했는데, 두부와 묵은 4인 이상 가족용 크기로 나와서 참 난감했다. 두부와 묵을 워낙 좋아해서 사오긴 했는데 하루 세 끼를 모두 한국음식만 먹는게 아니니 어떨 때는 일주일 내내 매일 묵을 먹다가 버리지도 못하고 애꿎은 묵만 원망하기도 했다. 된장찌개나 국은 주말에만 안심하고 끓여 먹으니 두부도 처치곤란은 마찬가지였다.

궁리 끝에 두부는 부치고, 간장에 조리고, 케첩과 고추장으로 조리고 어찌어찌 해결이 되었는데 묵은 어쩌지? 할 즈음 도토리묵 가루/청포묵 가루가 눈에 띄었다. 가루:물=1:4? 계속 젓다가 이래라 저래라.... 그래, 한글을 못읽는 것도 아닌데 어디 설명서 대로 해보자. 앗! 처음엔 성공, 두번째는 실패, 그 다음부터는 쭈우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ㄱ 성공.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도토리 묵 쑤어 먹은 얘기를 하면 다들 정신없이 웃는다. (하긴 나도 이런 내가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머니께서는 "뭐?" 하신다. (하긴 나도 내가? 한다.)

추석 흉내는 내고 넘어가야겠기에 내일 집으로 몇 사람을 불렀다. 잡채를 하려고 보니 당면 사놓은게 다 떨어졌는데 다행히 도토리묵 가루가 남아 있어서 미리 만들어 두었다. 내친 김에 청포묵도 쑤어볼까?

잘 먹고 잘 살기 2
칠레에는 PUC대학과 가톨릭대학이 있다? 1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1

칠레에 와서 이력서를 들고 이 학교 저 학교를 찾아다닐 때마다 당하던 "신분조사"가 그때는 아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싶어 너무 서러웠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데없이 나타난 치니타를 뭘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일까. 2010년 2월 칠레에 지진이 났을 때 난 춤을 추듯 흔들리는 아파트에서 여권과 지갑, 그리고 읽을 책 한 권을 들고 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남의 나라 살이를 의식하고 살았던 모양이다.

학교 내 모든 프로그램과 센터가 심사를 받는 중이라 학교 인트라넷 자료를 업데이트 해야했다. 평소에 무심하게 내버려뒀던 인트라넷에 학회발표에 논문에 자잘한 일들을 채워넣자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휴.. 다했다 한숨 돌리는 순간 첫 페이지에서 황당한 걸 발견했다. 국적: 북한. 어찌된게 profile은 내가 고칠 수가 없어 이메일을 보내고 그러고도 마음이 안놓여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 같은게 아니었군요." 한다. 그래.. 이것도 애초에 그냥 Corea라고 적어낸 내 잘못이다.. 했다.

얼마 후 담당자가 메일을 보냈다. "요청하신 사항이 수정되었습니다." 휴.. Corea del Sur.. 그래, 난 대한민국 국민이다!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2
못난이의 도전 1

Friday, September 9, 2011

못난이의 도전 1

-할머니 만도 못한 속도로 걷기
(몇 년 전) 연세드신 교수님이 사촌동생 별장에 같이 가자고 초대를 했다. 별장이라고 하면 지중해의 화려한 별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칠레사람들 중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은 산티아고 근교 바닷가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해 주말이나 연휴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말운전"무면허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쉬고 있자니 "우리 근처 동네 슈퍼에 가서 뭣 좀 사오자" 하시길래 따라나섰다. 이런, 맑은 공기도 쐴 겸 걸어가자던 별장 근처 동네 슈퍼로 가는 길은 내게는 거의 등산 수준이었으나 예순이 넘으신 교수님과 손녀딸들은 날아갈 듯 걸었다. 다음날은 옆동네 목장에 가자더니만 다들 말을 탔다. 승마 수준의 말타기도 아니고 그저 시골말을 타고 동네 한 바퀴 도는 거였지만 어릴 적 동물원에서 조랑말 말고는 타본 적이 없는 나는 "말운전"을 못해서 구경만 해야했다.

-그래, 배우자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없는) 친구와 계곡에 놀러갔다. 계곡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1. 걸어올라가기, 2. 자전거로 올라가기, 3. 말을 타고 올라가기,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말운전"을 못하는 나같은 사람들은 말주인이 말을 잡고 같이 가 준다기에 우리는 과감하게 3번을 택했다.

그러나 말주인이라고 하는 시골소년과 단 두 마리 뿐이라는 말을 보고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숫말은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았으나 암말은 새끼를 배서 배가 약간 부풀어 있었다. 180 정도의 키에 남자보다도 덩치가 좋은 친구가 당연히 숫말을 타고 나는 새끼 밴 말에 올라 슬리퍼를 짤짤 끌며 말고삐를 잡고 가는 시골소년에 의지하고 계곡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는 길에는 안내판도, 안전표지판도.. 정말 아무 것도 없고 내려다보면 점점 아득해지는 아래를 보다 도대체 말고삐를 제대로 잡은 건지조차 의심스러운 시골소년을 보고 있자니 어쩌자고 나는 이딴 "말운전"을 못한다 말인가 화가 났다.

그래, 배우자. 최소한 시골소년에 끌려가느니 우양우 좌양좌 정도는 하게 배우자,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승마를 배우려면 클럽 회원이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까다로운 절차가 많았다. 게다가 차가 없으면 가기도 힘들었다. 칠레제자가 어려서부터 승마를 배웠고 주말마다 엄마와 같이 승마클럽에 간다면서 회원가입 없이 레슨비만 내고 배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걸리는 제자 집에 가서 다시 차를 타고 30분을 달려 클럽을 가는 일을 1년 정도 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청바지를 입고 가서 장비는 클럽에 있던 것들을 쓰다가, 제자의 친구가 입던 승마바지를 물려 입다가, 결국은 저렴한 것으로 모자, 승마바지, 장화, 장갑, 채찍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장비 없이 타다가는 자칫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은 감정적인 동물이라 말과 친해져야 엉뚱한 움직임을 안보인다고 승마가 끝나면 안장부터 모든 장구를 떼어주고 목욕도 시켜주어야 했다. 말 타는 사이사이 각설탕이나 당근을 주며 칭찬도 많이 해줘야 했다. 승마를 배우기 시작한 첫 날은 집에 오자마자 너무 배가 고파서 정신없이 밥을 먹다가 배고픔이 겨우 가시자 몰려오는 말똥냄새에 질색을 하고 욕실로 달려갔다.

정작 승마를 배우며 보니 칠레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별장이든 바닷가든 어디서든 "말운전" 정도는 흔히 하며 자란다는 걸 알았다. 다들 정식 승마를 배우기 위해 온 것이지 나같이 시동도 걸 줄 모르며 온 사람은 없었다. 내가 대입 체력장 때 100미터를 16.5초에 뛰고 윗몸일으키기를 1분에 70개가 넘게 한 사람이야!라는 외침은 내 징징거림일 뿐이었고, 말이 겨우 내가 시키는 방향으로 가게하고 트로트와 갤럽도 얼추 흉내는 낼 무렵이 되자 대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연습을 한다고 여기저기 번호판을 단 구역을 빙빙 돌게 하는데, 나는 말운전 하기만도 벅차서 헤매기 일쑤였다. 내가 운동신경이 둔하다는 생각을 첨 해봤다고 국제전화로 어머니께 하소연을 하자 "그대도 나이가 드셨수"하고 놀리셨다.

점프를 배우라는 선생님의 압력이 시작되었다. 갤럽도 배우기 싫어 꾀를 부리다 선생님이 내가 탄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몰아쳐서 말이 달리는 바람에 떨어지기 싫어 기를 쓰며 겨우 배웠거늘 점프라니...내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면 누가 날 돌봐주랴, 이건 절대 아니다, 난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클럽 사람들은 점프를 해야 진짜 승마의 맛을 안다고, 심지어 말에서 떨어져 다쳐 팔에 기브스를 하고도 타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 통나무 3개를 나란히 땅바닥에 놓고 지나가기 훈련을 몇 번 해보고 나자 아니 땅바닥에 있는 통나무 건널 때에도 이렇게 움직임이 심한데 점프라니, 난 절대 안배울거야... 과유불급, 이런 욕심은 함부로 부리는게 아니야, 개똥철학을 굳혔다. 결국 꾀부림과 저항을 능가하는 선생님 구박을 못견뎌 내 말운전 면허시험은 어중간하게 끝이 났다.

-내 인생의 고삐잡기
요즘도 화창한 날이면 다같이 말을 타고 클럽 근처 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던 아름답기 그지없던 풍경과 나도 했구나 신나했던 성취감이 기억난다. 산길을 가는게 무서워 벌벌 떠는 나를 보고 승마선생님은 "말에게 몸을 맡기면 다 알아서 간다. 네가 운전을 하지 말고 그저 맡겨라"라고 하셨고, 정말로 그랬다. 말이 달릴 때에는 고삐를 꽉 잡고 절대로 아래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도 하셨다. 어설프게나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인생도 흐르는 대로 맡기되 고삐를 꽉 잡고 땅 보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달리면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점프 배우라고 구박만 안하시면 다시 배울 용의가 있습니다!

못난이의 도전 2
그들의 도전 1

이웃집 남자 1

경비실에서 1408호에서 날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과 꼭 얘기를 해야 한대요" 라고 한다. 1408호? 우리 윗집도 아랫집도 아닌데, 나한테 complain 할거라도 있나? 무슨 일이지?
잠시 후 찾아온 1408호,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1408호가 하는 말,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실은 내가 얼마 전 칠레 남부에 갔다가 한국여자애를 만났어. 우린 제법 친해져서(!!) 같이 여러 곳을 여행했어. 걔가 나한테 메모를 보냈는데, 이것 좀 번역해줄래?"
1408호가 "그녀"가 보낸 "그녀"의 사진을 건내주고 사진 뒤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있다. 메모: 크리스티안, 넌 정말 멋진 남자야. 널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녀 이름).
"네 이름이 크리스티안이니?" "응" "여자애 이름은 모모고?" "응" "여자애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살아?" "아니, 지금은 상파울로를 여행 중이래." "넌 정말 멋진 남자고 널 만난건 걔 인생의 행운이래." "오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너무 고마워"
에잇, 2011년 7월부터 칠레남부-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거쳐 현재 상파울로를 여행 중인 모모양, 다음부턴 영어나 스페인어로 메모를 보내주기 바랍니다.

이웃집 남자 2
못난이의 도전 1

Tuesday, September 6, 2011

칠레미장원탐방기 1

한국을 떠날 때 그 당시 유행하던 디지털 파마를 하고 있었다. 칠레에 가면 언제 미장원에 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게 나름 오래 가는 파마가 아닐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이런 스타일이어야만 해!
칠레에 와서 두어달 지나니 '정리'라는게 좀 하고 싶었지만 내 머리를 어떻게 해놓을지 걱정이 되어서도 미장원에 못가겠고, 커트/샴푸/드라이 각각 받는 미장원 비용을 감당할 엄두도 나지 않고, 당시에는 산티아고가 아닌 지방에 살고 있던 터라 한인촌 미장원에 가기도 힘들었다. 하숙집 부엌 가위로 앞머리를 자르는 시늉 정도 내고 있자니 하숙집 아줌마가 자기 단골미장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자기는 오랜 고객이라 특별 가격에 해줄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용사는 그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아르헨티나 여자였는데 날 보더니 동양여자 머리를 처음 만져본다면서 신기해했다. "동양애들 머리는 원리 생머리 아니니? 넌 왜 곱슬이지?" "아, 한국에서 파마라는걸 한거에요" "O, NO, 너의 아름다운 생머리가 나오는걸 보고 싶어" 그러더니 동양여자머리 처음 만져본 기념으로 커트/샴푸/드라이를 커트 가격 하나로 모두 해주었다. "넌 언제든 이 가격에 해줄테니 다음에도 꼭 오라"고도 했다. 그러나 아싸 하며 두어달 후 그냥 정리만 해달라고 갔더니만 "오오오 드디어 네 생머리가 보이기 시작해" 하며 심상치 않은 눈빛+가위질 이후 내 머리를 기모노 입은 일본인형처럼 앞머리 싹둑, 귀밑으로 싹둑...을 만들어놨다.
-파마를 하세요.
산티아고로 이사 온 이후에는 미국에 사는 친구가 미용기구 세트를 보내줘서 앞머리만 혼자 자르고 뒷머리는 거의 등까지 오도록 길렀던 것 같다. 그런데 기후와 물이 바뀐 탓인지 머리결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푸석푸석 곱슬 아닌 곱슬이 되어버린 머리를 주체하기 힘들어 한인촌에 딱 한 곳이던 한국 미장원에 1년에 한 두 번 정도 갔다. (손재주는 한국사람이 최고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후 내가 혼자 앞머리 자르기 장난을 1년 넘게 하는 사이에 한인촌에는 한국의 유명 헤어샵에서 근무하던 미용사가 와서 Vitacura에 한국미장원이 생겼다더라, Vitacura에서 망해서 결국 한인촌으로 갔다더라, 한인촌에 갑자기 미장원이 두 군데가 되어 둘이 사이가 어떻다더라.. 새로 생긴 미장원 미용사랑 주인이 싸우고 미용사가 도망을 갔다더라 말이 많았다.
여름이 되어 부석부석한 긴 머리가 너무 거추장스러워 내가 전에 가끔 가던 한인촌 미장원에 가니 미용사 언니가 바뀌어 있었다. 자기가 바로 그 한국에서 왔다가 주인이랑 싸워서 어쩌고 저쩌고의 주인공이라나... "언니 파마 좀 하지'하며 내게 파마를 강요하던 미장원 언니는 내 머리를 층층 단발로 잘라놓았다. "아.. 언니.. 난 머리 손질 잘 못해요.. 이러면 드라이 안하고는 못다니는데..." "어머, 그럼 파마를 해요. 그럼 되겠네."
-이제 좀 사람같다
부실부실 층층 너저분한 머리꼴을 하고 3년 만에 한국에 갔다. 친한 고교 동창은 얼굴은 거무스레하게 타고 몸은 두리뭉실에 정체불명 헤어스타일까지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날 데리고 미장원에 갔다. "원정아.. 이제 좀 사람같다"
-내가 파마 하랬잖아요
그해는 운이 좋아 2월에 한국에 다녀온 후 5월에 학회 초청을 받아 한국에 또 가게 되었다. 도착 다음날 바로 학회에 참석하게 되어 있던 일정이라 좀 깔끔하게 하고 가야 할 것 같아 살짝! 정리만 해달라고 미장원에 다시 간 게 화근. "어머, 언니는 파마는 안한다더니 어디서 했어요?"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왔어요." "그래요?" 그러더니 파마한 흔적 조차 사라지게 다시 내 머리를 부실부실 층층을 만들어놨다. "어.. 나 어떻게 해요.." "드라이로 막 바람을 넣어봐요. 그럼 될걸? 아님 파마를 하던지." 헐! 이후 혼자 앞머리 혼자 자르기를 꽤나 오래했다.
-네, 아니요
갑자기 칠레국회도서관에서 인터뷰요청이 왔다. 카메라멘까지 와서 녹화를 한다니 그래도 뭔가를 하는 시늉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전 한국의 유명 헤어샵에서 왔는데 어쩌니 저쩌니들 하는 새로 생긴 한인촌 미장원에 갔다. 이 아저씨 좋은 점은 질문이 없다는 거였으나 그래도 궁금한건 못참겠던지 이것저것 물으려 나름 애를 썼다. 그러나 내 대답은 "네" 아니면 "아니오"가 전부. "여기 안사시나봐요" "네" "한인촌에서 장사 안하시나봐요" "네" "다른 일 하시나봐요" "네""파마는 안하시고 그냥 앞머리만 자르실 거에요?" "네!"
· 

칠레미장원탐방기 2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 1

Monday, September 5, 2011

칠레에는 PUC 대학과 가톨릭대학이 있다? 1

일요일 (2011년 8월 21일) El Mercurio (칠레 최대 주요 일간지) 에는 페루가톨릭대학교 (Pontificia Universidad Catolica de Peru)가 "pontificia"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보며 칠레에는 PUC (Pontificia Universidad Catolica de Chile, 칠레가톨릭대학교) 대학과 가톨릭대학교가 있다고 하셨다는 모 교수님, 칠레에 있는 모든 가톨릭대학교가 모두 칠레가톨릭대학교의 지방캠퍼스라고 주장하시던 어느 분, 그 학교는 교수들이 주로 신부나 수녀 아니냐고 하시던 모모 교수님이 떠올랐다.

답하자면, 칠레에는 칠레가톨릭대학교와 여러 가톨릭대학들이 있다. 같은 가톨릭계 대학이지만 모두가 다른 대학이다. 2004년 2학기부터 지난 학기까지 강의를 나갔던 발파라이소가톨릭대학교 (Pontificia Universidad Catolica de Valparaiso)도 칠레가톨릭대학교의 분교가 아닌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대학이다.

가톨릭대학 중 pontificia를 단 대학들은 특별히 바티칸으로부터 특별히 그 권위와 가톨릭정신을 인정받은 대학들이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주요 사안은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바티칸의 승인을 받는다. 가톨릭대학으로서 'pontificia'를 단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실적' 심사를 받는다. 학교의 학문적 수준, 그리고 가톨릭정신이 어떻게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본다.

교수들의 대부분은 물론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아닌 "일반인"들이다. 칠레가톨릭대학교의 경우 총장님도 성직자가 아닌 의대 교수 출신이다. 신학과 교수들도 성직자보다는 학문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더 많을 정도다.

한국의 모 대학과 교류얘기가 오가는 중에 "그 학교 그거 신부 만드는 학교 아니야?"라는 의견이 나와 교류를 맺지 못할 뻔한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대학들에 대해 어찌 다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을까? 흔한 편견으로 인해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칠레에는 PUC대학과 가톨릭대학이 있다? 2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1

http://monthly.chosun.com/client/coreporter/cowriterboardread.asp?idx=6149&cPage=1&cowid=wonjung_min#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259064167438948#!/note.php?note_id=266674786677886

산티아고종교탐방사 2

JH 양 덕에 새록새록 기억 나는 종교탐방사가 또 있나니.
- 넌 채식주의자+불교도여야만 해
칠레에서 한국과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주제로 연구한답시고 칠레사람들이 동양을 주제로 하는 온갖 행사에 기웃기웃하다 쿤달리니 요가를 알게 되었다. 칠레에 처음 와서는 젓가락같이 마르더니만, 6개월 정도 지난 후부터는 지구다 좁다 싶게 살이 찌기 시작해서 (살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안 찌기 위해)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어느 행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마침 외국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강사였는데 크리스마스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불렀다. 그녀의 (여) 동생은 칠레 외교관이었는데 외교부 직원들 대상 요가교실이 여름 휴가철인 1, 2월엔 학생 수가 적어 폐강될 수가 있으니 와서 저렴한 가격에 요가도 하고 정족수도 채워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요가강사는 하얀 터번을 두르고 요가 시작하기 전/후에 꼭 만트라를 불렀다. 어느날인가는 자기 친구 (역시 요가강사)가 마사지를 하는데 특별 할인기간이니 가보라고 해서 갔더니만, 향을 피워놓고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 마사지를 해줬다. 아.. 내가 어릴적 할머니 어깨 주물러 드린게 이것보단 낫지 싶었다. 3월 개학후 부터는 요가강사의 스승이 직접 강의한다는 요가교실이 마침 집근처에 있어 다니기 시작했다. 칠레에 쿤달리니 요가를 들여왔다는 아름다운 미국인 강사를 보니 열심히 하면 살이 빠질 것도 같았다. 그러나 주말반을 맡은 엄청나게 유연한 살집 든든한 칠레 강사들을 보면...... 요가강사들은 모두 채식주의자에 가톨릭에 회의를 품고 불교로 개종했음은 물론, 동양에서 온 나는 당연히 채식주의자에 불교라고 생각했다. 2월에는 남미 쿤달리니 합동 연수회가 있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하루 종일 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짝을 지어 요가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명상을 하고 콩고기 패드를 넣은 햄버거를 먹고 내가 보기엔 그냥 생강차인데 다들 감탄해 마지 않는 차를 마시며 내 영혼도 정화되었겠거니 했다.
- 참한 그녀
언젠가 기자단 통역으로 따라 온 한국여학생이 하도 참하고 괜찮아보여서 교민이냐 물어보니 아, 그게요... 여기서 공부해요? 하고 물어도 아..그게요.. (다른 교민들이 내게 묻듯) 어느 교회 다녀요? 하고 물어도 아, 그게요... 하길래 농담반 진담반 '통일요에요?'했더니 네.. 한다. 갑자기 기자들이 '와, 칠레에도 통일교가 있어요?'하고 질문공세를 시작하자 그녀는 아, 그게요.. 만 연발.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으니 '아.. 어디어디 쯤에..'하고 흐물흐물한 답을 했다. 가끔 누가 통역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참한 그녀를 떠올리는데 연락처를 받아두지 못한게 늘 아쉽다.
- 남반구의 풍수지리는?
연구한답시고 칠레 최고의 풍수지리전문가가 한다는 풍수지리 강의를 들으러갔다. 칠레는 남반구에 있으니 북반구 중국에서 쓰이는 풍수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게 전문가의 지론이었다. 고로, 북쪽은 남쪽으로 남쪽은 북쪽으로.. 하는 식으로 칠레식 풍수지리판도 보여주고, 사주를 볼 때에도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를 반으로 나누어 자는 오로 축은 미로 하는 식으로 태어난 년/월/일의 12간지를 달리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시간은 어떻게 해야 하죠? 시간도 자시는 오시로, 축시는 미시로 해석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던게 화근. 전문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강의가 끝나자 나를 동양에서 온 풍수전문가라 오해한 칠레아주머니들이 몰려들어 난 그 자리에서 줄행랑을 쳐야했다.
- 때가 되면
한국기업에 잠시 근무하던 분이 무슨무슨 지하철역에서 타로카드를 보는 아르헨티나여자가 정말 끝내주게 잘 맞춘다고 꼭 한번 가보라고 했다. "내가 칠레에 살아야 할까요, 한국에 가야 할까요?" "때가 되면 갈거야" "그 때가 언젠가요?" "글쎄, 카드에는 안보이는군. 언젠가는 갈거야." "전 그냥 계속 혼자 살까요 아니면 누굴 만날 수도 있을까요?" "때가 되면 만날거야." "그 때가 언젠가요?" "글쎄, 카드에는 안보이는데 언젠가는 만날거야." 에잇!
- 난 모든 도를 섭렵했어
꼭 (내 취향엔 요상한) fusion 식당으로 약속장소를 잡는 친구가 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약속장소에 갔더니 마침 이웃 친구가 온다고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뭐 그러지.." 잠시 후 도착한 그녀의 친구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자기는 동양사상에 심취한 사람이라고 한다. "무슨 사상?" 하고 물으니 "풍수, 사주, 타로, 도교.. 난 모든 걸 두루 보려 노력하지." 옆에 있던 친구가 "이 친구가 그에 대한 책도 많이 썼다"고 추임새까지 넣는다. "그럼 사주 볼 때 영감으로 봐, 사주로 봐?"라고 묻자 전문가님 표정이 좀 어두워지며 이 얘기 저 얘기 아는 얘기는 다 풀어 놓느라 애를 썼다. 내가 양띠라고 하자 무슨 얘기 끝에 소띠와 양띠가 찰떡 궁합이라길래, "음.. 한국에서는 네 살 차이 궁합이 좋다고 하는데? 소띠랑 양띠는 안좋은거 아닌가?" "그래서 좋은거야. 서로 안좋으니까 자석같이 끌려서 결혼하는거야. 끝없이 싸우면서도 끌리는거야. 내 여동생도 그렇고 난 소띠와 양띠가 만나 지독하게 싸우며 사는 수많은 커플을 봤어." 내가 별로 수긍하는 것 같지 않자 그녀는 정말 지나치게 애를 쓰며 자기 지식을 내세우기 위해 애를 썼고, 나도 친구와 정작 할 얘기는 못하고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대답을 시큰둥하게 하고 친구랑 원래 해야할 얘기에만 집중을 하자 계속 나를 노려보던 그녀가 "너 /// 년생 양띠지." "응" "너 내가 이거 어떻게 알아맞췄는지 궁금하지 않나? 난 영감으로 알아."
- 용하다는 그녀
오늘 오랫만에 요가교실 친구들을 만났더니 유명한 타로점쟁이가 있다고들 난리다. 그런데 너무 직접적으로 물으면 안된다나. "그럼 어떻게 물어?" "이러는게 나한테 좋을까요 저러는게 좋을까요 하고 물어야지 미래를 물어보면 안돼." 아니 그럼 가서 뭘 물어보라는거야!

산티아고종교탐방사 3
산티아고종교탐방사 1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259064167438948#!/note.php?note_id=273969385948426

산티아고종교탐방사 1

사이비종교 짱 좋아한다는 JH 양 얘기를 듣고 기억난 산티아고 종교탐방역사.
- 대만 절
1월인가 2월이라 구정을 앞둔 때였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은 Bienvnido 이외의 스페인어는 전혀 못하셨고, 대만무역관에 다니던 친구가 사이사이 통역을 해줬다. 다같이 금강경을 읽을 때에는 대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따라갔는데, 설법이 시작되자 그냥 멍. 허름한 옷차림의 아저씨께서 (알고 보니 재벌재벌) 당신 아들은 칠레사람들 대상 법회에서 통역을 하니 거기 따라가라고 하심. 거의 두어 달 이상 일요일이면 그 아들이 전화를 함. 칠레사람들 법회를 구경해보고도 싶었으나 아니지 아니지. 구정이라고 다들 등값을 내는데 부처님께서도 칠레에서 한국어로 하는 기도는 머리 아파 하실 것 같아 관둠.
- 호주 아줌마 교주
환경학박사로 국제기구에서 일하던 미국친구가 푹 빠졌던 모임. 호주출신 교주가 창당. 요일 저녁에 모임이 있으니 혼자 있다고 울적해하지 말고 가보라고 적극 권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얘가 30분 이상 버스가 안와서 버스가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랬더니 왔다는 경험담 (그냥 멍). 어느날 호주에서 교주가 왔는데 직접 만들었다는 색색가지 천 위를 눈을 감고 돌라고 하더니 갑자기 Stoooooop. 자기가 멈춰 서 있는 색깔이 마음을 비추는 색이라며 설명. 내가 멈춘 색은 지금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던가. 종교 불문 도를 통한 사람들의 포스와 납득할 만한 말.. 그러나 자기가 쓴 책이 있는데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는 말을 듣고 이쿠....
-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
호주아줌마교주 모임에서 채식주의 요리강좌가 있다고 해서 구경감. 꼭 태양열에 발효시켜야 한다는 호밀빵 (그럼 JH양 말대로 겨울엔 빵을 못먹나? ㅋ), 오븐에 구운 피망으로 만든 요리 (이건 정말 맛있다), 이어진 두부 요리. 이건 oriental magic이라는 부연설명. 두부를 손바닥에 놓고 거친 깍두기 모양으로 팬에 넣더니 올리브유를 약간 두르고 부치기 시작한다. "오, 어머, 세상에, 저런거였어" 이어지는 감탄사. "변화를 주고 싶을 땐 간장을 좀 넣으면 특별한 맛이 나죠" "오..... " 더욱 커지는 감탄사. "merquen (칠레고춧가루)을 넣어볼까요? 정말 신비롭지 않아요?" 그러나 표정마저 신비롭던 요리강사는 두부요리를 보여주다 내 얼굴을 보더니 얼굴이 굳었다.
- 한국교회
한인촌에 거의 안가고 한인 슈퍼도 남들이 잘 안가는 구석쟁이 슈퍼를 가다보니 칠레에 와서 1년이나 지났는데 A모 마켓 아줌마가 "어느 교회 다니는 아가씬데 내가 첨 보지?" 라고 물음.
브라질에서 열린 중남미한글학교교사연수회에 강의를 갔는데, 토요일 저녁에 되자 상파울로에 있는 한인교회 리스트를 보여주며 내일 어디로 가시겠냐고 묻는다. (교회 다니세요? 라는 질문은 절대 없음) "저 교회 안다니는데요?" "....." 그날 밤, 같은 방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 "회장님께서 민선생 왜 교회 안다니냐고 너무 걱정하셔서 내가 이민 생활이 짧아서 철이 없어 그런다고 했어. 내가 말 잘 해놨으니 걱정마" 다음날 오후 갑부교민의 별장으로 이동해서는 거의 교회 수련회 수준. 그냥 눈 감고 멍.
모임에서 만난 한인분께서 왜 교회에 안나오냐고 언짢아하심. "교회 안다니는데요"를 반복하기도 머쓱해서 "일요일에 늦잠을 자요"라고 했던게 화근. 어느 일요일 아침에 어느 분이 전화, "어머, 주일인데 일찍 일어났네?" 두어주 후 다른 분께 온 전화, 어머, 주일인데 일찍 일어났네?" 그제서야 이쿠..
- 마음의 점
프랑스 철학가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칠레친구가 푹 빠진 가톨릭종파. 프랑스 신부님이 교주. "아모흐 아모흐 (amor)" 프랑스 발음의 스페인어에 칠레나들 거의 넘어감. 칠레에 파견 나온 몇몇 젊은 프랑스 seminaristas 들 또한 멀리서도 빛이 나는 외모의 소유자들. "야, 그 아모흐인지 아모르인지는 꼭 그 신부님이 말 안해도 당연한거 아니냐"고 했다가 우정 끊길뻔함.
- 언니는 소망이 뭐예요?
1년에 두어번 가던 한인촌 미장원 아줌마는 나만 가면 "언니는 소망이 뭐예요? 난 주님을 만나고 삶을 되찾았어요"가 대화주제였다. 미장원 다락방을 들락들락하던 한국인 청년들 그룹은 알고 보니 사단법인 국제청소년... 협회를 만들어 선교활동을 하는데, 난데없이 학교로 찾아오기도 하고, 주재원 이름을 대며 그 분이 소개해주셨다고 하기도 하고, 인터뷰를 하자고 하기도 하고, 배우 최불암 씨와 전직 .. 장관 .. 씨도 우리 모임에 오셔서 강연을 해주셨다고도 하고... 어느날 칠레학생이 "무슨무슨 대학에서 한국문화행사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뭐 좀 하는척 하다가 갑자기 목사님이 오시더니 다들 행복한 얼굴로 기도를 시작했어요", 또다른 학생이 "한국어 가르쳐준다고 해서 갔는데 좀 이상했어요"...... 우리의 소망은 뭘까.
- 진심을 여세요
통역일을 많이 하던 K는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다. 몇년 전 왔던 기자그룹들 통역을 맡아 학교에 왔었는데, 다같이 저녁을 하러 가게 되었다. 철학과를 나왔다는 기자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K는 사뭇 진지하게 그의 종교적 철학을 얘기했다. "교회는 헌금을 걷죠.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교회 어딘가에 헌금통이 있지만 목사님께서 헌금통이 어디에 있으니 헌금하라는 얘기는 하지 않으세요. 그저 각자의 진심에 달린거죠." "말 안해도 어디 있는지 다 아니까 말씀 안하시는거 아니에요?" 순간 썰렁해진 분위기...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아 대문밑으로 쪽지가 들어왔는데 온통 중국어로 써 있는 쪽지에서 내가 식별할 수 있는 글자는 友, 愛情, 證人.
- 한국전통의상은 독특하군
2년 전 쯤 한인촌에 들어온 원불교 교무님께서 한글 가르칠 교재를 좀 달라고 해서 만났는데 "결국 한국어 가르치는 궁극적인 목적은 포교세요? 저는 종교는 종교로 다가가야지 나라를 이용하는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는 4가지 없는 말로 교무님 기분을 상하게 만듬. 그러던 어느날 칠레교수 한 명이 한다는 말, "너는 하얀 자켓이랑 검은 치마 왜 안입어? 칠레라서 안입는거야?
- 수녀가 되세요
칠레학생들에게 한국가돌릭역사를 소개해주십사 부탁드리기 위해 만난 한국인 신부님과의 대화는 일 얘기만 하는 나 vs 왜 가톨릭신자가 국인 신부님을 앞에 두고 고해성사도 질문도 없느냐, 왜 한인 성당을 안나가느냐 를 주제로 늘 엇나갔다. 학교생활이 어떠냐길래 "이러이러해서 보람도 있지만 남의 나라라 힘든 것도 어쩔 수는 없지요"라고 말씀드리자 "뭐 민선생 자랑질을 들어보니 민선생 없으면 학교가 안돌아가겠군. 수녀가 되지 그래요. 수녀원에서는 일한 만큼 승진할 수 있어요" "...."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하다 갑자기 끼어든 약간 취한 한국여학생 왈, "어머, 교수님 수녀복도 잘 어울리실거 같아요" 이후에도 수녀되라는 얘기를 몇 번 더하시더니 들려주신 당신의 연애담은 물론 파계신부님들의 온갖 스토리..., 이 일 이후 난 거의 우울증 걸릴 뻔 했다. ...
- Opus Dei
전에 와있던 J기자가 칠레에서 Opus Dei를 인터뷰해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J기자를 만나고 일주일 후, 정년퇴직하는 교수님 환송모임이 있다고 해서 동료집에 갔더니 집은 중세 스페인식 귀족저택 수준이고 식구들은 많아 보이는데 형제 같지는 않고... 집안에 있다는 예배당은 거의 자그마한 성당 수준이었다. 알고보니 Opus Dei 공동체 생활을 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나를 거의 서른이나 되었을까 하는 애로 보는 것도 모자라 "전 남자를 몰라요'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어느날 차를 마시자더니 자기들 모임에 와서 특강을 해보라고 한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교수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절대 가지 말고 조심해라. 아마 공동체 생활 같이 하자고 할거다, 조심해"
- 프리메이슨
J기자가 말만 꺼내면 신기하게도 이루어졌나니. 어느날은 J기자가 자기 집주인 아저씨가 프리메이슨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다면서 칠레 프리메이슨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얼마 후 미국인 친구 B집에 놀러갔는데 이웃에 사는 B의 친구가 놀러왔다. 예순도 넘은 할머니였건만 정말 아름답고 온 몸에 우아함이 넘쳤다." "저 분 정말 아름답다, 젊어서는 더 아름다우셨겠지?"했더니 B가 말했다. "Of course! 영국사람이고 남편이 칠레 주재원 생활을 하다 영국에 돌아갔는데 노년은 칠레에서 보내려고 왔어. 프리메이슨 집안이지." Oh, my God!
- 길을 찾아라
데모로 어수선한 가운데 학교 캠퍼스 중 하나가 학생들 점거로 마비가 되어 일부 사무실이 우리캠퍼스로 피신을 왔다. 비서 중 한 명이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더니 "그럼 그 길을 아느냐"고 묻는다. "무슨 길?" 내가 다니는 교회는 하나님의 길을 찾는거야. 우리는 예수님, 마리아, 그런걸 찾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찾아. 한국에서 온거야. 이건 또 뭔가...
혼자 지내면 남자들의 유혹이 넘치는게 아니라 종교의 유혹이 넘친다. J 기자님, '민교수님 남친 생기셨어요'라고 멘트 한 번 날려주고 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그 다음주로 바로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산티아고종교탐방사 2
이웃집 남자 1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259064167438948#!/note.php?note_id=272939089384789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1

어제 Y박사님께서 한국이 그립고 오고 싶어질 때가 언제냐고 물으셨다.
나는 어쩌다 한국에 와서 딱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가장 한국이 그립다. Year by year 프로젝트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내 눈에는 요사이 부쩍 할 일이 많아졌다 불평하는 한국교수들의 푸념이 배부른 투정으로 들려 부럽고, 우리말로 실컷 떠들 수 있다는게 신나고, 사방이 온통 같은 한국사람들이라 나를 지하철에서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고, 좋아하는 총각김치만 있으면 냄새 걱정 없이 밥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다는게 엄청나게 신기하고 좋다.
그런데 또 일주일이 지나면, 뼈가 있고 씨가 있어 해석하며 들어야 하는 한국식 대화가 피곤하고, 너나 내나 들고 다니는 짝퉁명품 구경이 시큰둥해지고, 지하철 역마다 반복되는 화장품가게가 불편해지고, 하의실종패션이 편안하지 않아 다시 칠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칠레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뼈저리게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데, 내가 보는 한국은 더이상 내가 알던 한국이 아니다. Citizen of the world인가, 국제 미아인가. 나는 칠레에서도 한국에서도 같은 고민을 한다.

Una semana y otra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2
칠레미장원탐방기 1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259064167438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