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2, 2011

이웃집 남자 3

쿵, 쿵, 쿵, 쿵...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터미네이터가 내던 발걸음이 들렸다. 안경이나 렌즈 없이는 반 장님인 눈으로 커튼 사이에서 춤을 추는 빌딩들이 보였다. 한국에 다녀와서 거의 일주일을 낮에는 볼 일 보느라 못자고 밤에는 시차 때문에 못자서 내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했다.

밖에서 누가 "문 열어, 문 열어" 하며 문을 두드렸다. 어떤 술취한 놈이 자기 집도 못찾아가고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군. 그런데 계속 소리를 지른다. 내가 술이 취했나 땅바닥이 왜 자꾸 움직여 하면서 주섬 주섬 옷을 갈아 입는데 마루에서 뭔가 쨍그랑 소리가 들리고 거실에 달아 놓은 종이 땡땡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게 뭐지... 대문을 열려고 하니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문이 안 열려요" 울먹거리니 문 손잡이를 내리고 있으라고 한다. 하나, 둘, 셋, 밖에서 문을 밀자 그제서야 대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 이제 어떻게 해요?" 하려고 보니 우리집 문 두드려주던 사람은 앞집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2010년 2월 27일 새벽 3시 반, 칠레에 20년 만에 강진이 닥친 날이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대로 문틀을 잡고 있자니 잠시 후 지진이 멈췄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데 다행히 경비실에 인터폰은 할 수 있었다. 지진이 멈췄으니 일단 집을 비우라고 한다. 혹시 어디서 가스가 터지거나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기도 안들어오고 렌턴도 없고.. 어떻게 내려가지 하고 있는데 다른 이웃남이 오더니 같이 내려갈래? 한다. 옆집에 살던 스페인 여자애도 나온다. 남편이 하필 지금 출장 중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안보이는 13층 계단을 이웃남 등짝만 쳐다보며 내려갔다.  잠시 후 경비실에서 이제 올라가도 된다고 한다. 아.. 어두운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지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같이 올라갈래?" 한다. "응, 그런데 넌 몇 층까지 가는데?" "너 아까 나랑 같이 내려왔잖아."

지진 이후 두 주 동안 가스와 더운물이 끊겼고, 다행히 전기는 들어왔지만 불안정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슈퍼에 다녀왔는데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전기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같이 타고 있던 이웃남은 잽싸게 전 층을 모두 눌렀다. 경비실에서 아무 층이나 엘리베이터가 서면 내리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3층인가에서 내렸다.

일주일 치 장을 본 봉투를 양 손에 들고 거기서 13층까지 어찌 올라가야 난감하던 차에 엘리베이터 이웃남이 자기가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런 고마울데가.

여진도 잦아들고 마음도 가라 앉자 갑자기 고마운 이웃남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난 아파트에서 한 번도 그들을 본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혼자 지내는걸 알지? 그러나 내 얘기를 들은 칠레친구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어떻게 했어? 누가 제일 괜찮았어?" 한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걸." "얘, 너 바보 아니니? 어차피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될거 아니야. 고맙다고 커피라도 같이 마시러 가자고 하던지, 봉투를 집까지 들어다줬으면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해야지 시시하게 뭐야."

그래, 나 시시하다. 무섭다고 말했더니 같이 걱정은 안해주고 나쁜 지지배들. 혼자 씩씩대긴 했으나, 그렇다, 난 역시 작업정신이 철저하게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웃집 남자 4
이웃집 남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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