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9, 2011

이웃집 남자 5

-이름 없는 메일

칠레에 처음 와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닐 때 무료 특강을 많이 했었다. 어느 학교에서 무료 특강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자기 소개는 없었고, 내 특강을 들은 사람이라고만 했다.

-신비한 "그"
6개월 이상 메일이 왔다. 첫 메일을 받았을 때에는 특강에 관심가져 주어 고맙다, 그런데 어디에서 일하는 누구냐고 묻는 답을 보냈는데, 내 질문에는 답이 없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메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뛰어난 어휘와 문장 구사력이었다. 나는 아직도 세세하고 미묘한 감정표현을 스페인어로 다 할 수 없어 답답할 때가 많은데, 아, 이런 형용사가 있었구나, 아, 이런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뛰어난 문장이었다. 답장도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사전을 찾아가며 메일을 읽었다. 칠레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형용사, 부사, 속담 등등... 그런데 별로 답장을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메일을 보내면서 절대로 자기 소개는 하지 않았다.

-무서운 "그"
2-3개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긴 메일을 읽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는 자기 소개도 하지 않으면서 꼭 만나고 싶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만나면 안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6개월이 지나자 더이상 메일은 오지 않았다. 이제 지쳤군 하고 말았다.

메일이 끊기고 1년 쯤 지나서였다. 누군가 계속 MSN으로 친구 신청을 했다. 잘 모르는 이름이어서 '거절'을 눌러도 줄기차게 친구 신청을 했다.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아! 했다. 바로 "신비하고 무서운 그"였다.

친구신청을 받아주지 않자 "답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얘기만 들어"달라며 이러저런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더니 "내 말에 끝까지 답을 안하는군. 답 좀 하지" 했다가 "그냥 듣기만 해"했다가... 

-비슷한 "그"
(칠레)친구와 쇼핑몰에 갔는데 어느날 친구가 그 날 자기가 아는 사람이 몰에서 나를 보고 자기더러 날 소개해달라고 졸라댄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했더니 "여기서 교수하는 동양여자가 몇 명이나 되겠어. 네가 어디서 무슨 일 하는지, 언제 어느 학회에 갔는지까지 다 꿰고 있던걸" 한다. Oh, my God! 메일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은 아닌 것 같았지만, 너무 무서웠다. 친구가 그 얘기를 꺼낸지 1년도 더 지나서 "얘, 그 사람은 아직도 나만 보면 졸라댄다"고 했다.

-사랑인가 집착인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칠레에 도착해 매년 국적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어봤다는 멕시코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어찌나 집착이 심한지 칠레남자친구랑 헤어질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었다. 한 번 마주친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1년 이상 조르는 건 집착아니냐는 내 말에 칠레친구는 왜 사랑을 무시하느냐고 했다. 사랑인가, 집착인가, 글쎄 어찌되었든 신비하고 무서운 "그들"의 마음은 내게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 남자 6
이웃집 남자 4

2 comments:

soonjoo lee said...

어제 생각나신 그 얘기...^^

Anonymous said...

선생님같은 독자들만 있다면 이거 정말 글 쓸 맛 나겠는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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