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만도 못한 속도로 걷기
(몇 년 전) 연세드신 교수님이 사촌동생 별장에 같이 가자고 초대를 했다. 별장이라고 하면 지중해의 화려한 별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칠레사람들 중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은 산티아고 근교 바닷가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해 주말이나 연휴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말운전"무면허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쉬고 있자니 "우리 근처 동네 슈퍼에 가서 뭣 좀 사오자" 하시길래 따라나섰다. 이런, 맑은 공기도 쐴 겸 걸어가자던 별장 근처 동네 슈퍼로 가는 길은 내게는 거의 등산 수준이었으나 예순이 넘으신 교수님과 손녀딸들은 날아갈 듯 걸었다. 다음날은 옆동네 목장에 가자더니만 다들 말을 탔다. 승마 수준의 말타기도 아니고 그저 시골말을 타고 동네 한 바퀴 도는 거였지만 어릴 적 동물원에서 조랑말 말고는 타본 적이 없는 나는 "말운전"을 못해서 구경만 해야했다.
-그래, 배우자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없는) 친구와 계곡에 놀러갔다. 계곡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1. 걸어올라가기, 2. 자전거로 올라가기, 3. 말을 타고 올라가기,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말운전"을 못하는 나같은 사람들은 말주인이 말을 잡고 같이 가 준다기에 우리는 과감하게 3번을 택했다.
그러나 말주인이라고 하는 시골소년과 단 두 마리 뿐이라는 말을 보고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숫말은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았으나 암말은 새끼를 배서 배가 약간 부풀어 있었다. 180 정도의 키에 남자보다도 덩치가 좋은 친구가 당연히 숫말을 타고 나는 새끼 밴 말에 올라 슬리퍼를 짤짤 끌며 말고삐를 잡고 가는 시골소년에 의지하고 계곡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는 길에는 안내판도, 안전표지판도.. 정말 아무 것도 없고 내려다보면 점점 아득해지는 아래를 보다 도대체 말고삐를 제대로 잡은 건지조차 의심스러운 시골소년을 보고 있자니 어쩌자고 나는 이딴 "말운전"을 못한다 말인가 화가 났다.
그래, 배우자. 최소한 시골소년에 끌려가느니 우양우 좌양좌 정도는 하게 배우자,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승마를 배우려면 클럽 회원이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까다로운 절차가 많았다. 게다가 차가 없으면 가기도 힘들었다. 칠레제자가 어려서부터 승마를 배웠고 주말마다 엄마와 같이 승마클럽에 간다면서 회원가입 없이 레슨비만 내고 배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걸리는 제자 집에 가서 다시 차를 타고 30분을 달려 클럽을 가는 일을 1년 정도 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청바지를 입고 가서 장비는 클럽에 있던 것들을 쓰다가, 제자의 친구가 입던 승마바지를 물려 입다가, 결국은 저렴한 것으로 모자, 승마바지, 장화, 장갑, 채찍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장비 없이 타다가는 자칫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은 감정적인 동물이라 말과 친해져야 엉뚱한 움직임을 안보인다고 승마가 끝나면 안장부터 모든 장구를 떼어주고 목욕도 시켜주어야 했다. 말 타는 사이사이 각설탕이나 당근을 주며 칭찬도 많이 해줘야 했다. 승마를 배우기 시작한 첫 날은 집에 오자마자 너무 배가 고파서 정신없이 밥을 먹다가 배고픔이 겨우 가시자 몰려오는 말똥냄새에 질색을 하고 욕실로 달려갔다.
정작 승마를 배우며 보니 칠레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별장이든 바닷가든 어디서든 "말운전" 정도는 흔히 하며 자란다는 걸 알았다. 다들 정식 승마를 배우기 위해 온 것이지 나같이 시동도 걸 줄 모르며 온 사람은 없었다. 내가 대입 체력장 때 100미터를 16.5초에 뛰고 윗몸일으키기를 1분에 70개가 넘게 한 사람이야!라는 외침은 내 징징거림일 뿐이었고, 말이 겨우 내가 시키는 방향으로 가게하고 트로트와 갤럽도 얼추 흉내는 낼 무렵이 되자 대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연습을 한다고 여기저기 번호판을 단 구역을 빙빙 돌게 하는데, 나는 말운전 하기만도 벅차서 헤매기 일쑤였다. 내가 운동신경이 둔하다는 생각을 첨 해봤다고 국제전화로 어머니께 하소연을 하자 "그대도 나이가 드셨수"하고 놀리셨다.
점프를 배우라는 선생님의 압력이 시작되었다. 갤럽도 배우기 싫어 꾀를 부리다 선생님이 내가 탄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몰아쳐서 말이 달리는 바람에 떨어지기 싫어 기를 쓰며 겨우 배웠거늘 점프라니...내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면 누가 날 돌봐주랴, 이건 절대 아니다, 난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클럽 사람들은 점프를 해야 진짜 승마의 맛을 안다고, 심지어 말에서 떨어져 다쳐 팔에 기브스를 하고도 타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 통나무 3개를 나란히 땅바닥에 놓고 지나가기 훈련을 몇 번 해보고 나자 아니 땅바닥에 있는 통나무 건널 때에도 이렇게 움직임이 심한데 점프라니, 난 절대 안배울거야... 과유불급, 이런 욕심은 함부로 부리는게 아니야, 개똥철학을 굳혔다. 결국 꾀부림과 저항을 능가하는 선생님 구박을 못견뎌 내 말운전 면허시험은 어중간하게 끝이 났다.
-내 인생의 고삐잡기
요즘도 화창한 날이면 다같이 말을 타고 클럽 근처 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던 아름답기 그지없던 풍경과 나도 했구나 신나했던 성취감이 기억난다. 산길을 가는게 무서워 벌벌 떠는 나를 보고 승마선생님은 "말에게 몸을 맡기면 다 알아서 간다. 네가 운전을 하지 말고 그저 맡겨라"라고 하셨고, 정말로 그랬다. 말이 달릴 때에는 고삐를 꽉 잡고 절대로 아래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도 하셨다. 어설프게나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인생도 흐르는 대로 맡기되 고삐를 꽉 잡고 땅 보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달리면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점프 배우라고 구박만 안하시면 다시 배울 용의가 있습니다!
못난이의 도전 2
그들의 도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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