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3, 2012

못난이의 도전 52

한국 모 대학에서 국제관계 쪽 일을 하시는 분을 우연히 뵈었는데 대뜸 "거 칠레는 낮잠을 몇시간 자나요? 스페인 가보니 siesta (오후 휴식시간)이 있던데..." 하셨다.
"칠레에는 siesta 없는데요" "칠레도 스페인 식민지 아니었어요? 그럼 있을 거 아니에요" "없는데요" 칠레에 사는 내가 칠레에는 siesta가 없다고 말씀드리는데도 이 분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셨다. 다행히 옆자리에 계시던 독일에서 오신 분께서 "내가 칠레에 가보니 칠레 분위기가 독일과 흡사했어요. 다른 중남미와는 좀 달랐어요. siesta 없던대요?" 하시는 덕분에 그 분의 '대답유도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국 분과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는데 중남미의 한국학상황에 대해 물으셔서 이런저런 대답을 해드렸다. "그럼 선생님 계신 학교에서는 한국학국제학술회의를 매년 하시나요?" "네, 매년 하는데, 매년 프로젝트 지원에 달려 있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매년 지원을 받아서 개최가능했습니다." "한국인 교수님들은 몇 분이나 참가하시나요?"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은 없습니다. 마침 칠레에 연수나오신 기관분들이나 교수님들이 계시면 참가를 권하지만 한국에서 오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지인들 중심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다시 중남미 국가 한국학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분은 다시 "그럼 선생님 계신 학교에서는 한국학국제학술회의를 매년 하시나요?"와  "한국인 교수님들은 몇 분이나 참가하시나요?" 를 또 물으셨다. "선생님,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 때 책, 프로그램 모두 드렸고 설명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전에도 설명 드렸습니다." "아, 네, 압니다. 그런데 보고도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매년 학술대회 하는 경우는 없어서요. 그리고 해외에서 한답시고 한국교수들 우르르 가는 경우도 많아서요." "네, 그런데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quality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분이 똑같은 질문을 또 물으시면서 나는 말그대로 뚜껑이 열렸다. "자료도 제출하고 말로도 설명드린 것을 모르시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왜 보고를 해야 합니까? 직접 와보셔야 합니다. 중남미대학 여기저기를 직접 가보시면 국가별 대학별 상황, 차이 등이 모두 보입니다. 어쩌다 오셔서 호텔에 여러 대학 교수들 다 모아놓는 식은 아닙니다."

아.. 이건 치명적 실수였다. 매년 프로젝트에 목숨 걸고 사는 주제에 앞으로 돈줄이 될지도 모를 분들에게는 굽실거려도 모자랄 판에, 이건 또 왜 난데없는 성질부림이란 말이냐. 그러나 나는 그 분 개인에게 화가 난 것이라기 보다, 한국이 국제화, 국제화 하면서도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여러 나라를 방문해 본 사람은 가보지 않은 나라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한국에서 정해놓은 틀에 다른 나라/다른 문화를 짜맞추는 것에 화가 났다. 중남미에 대한 획일적 편견, 그리고 지난 몇 년을 울고 웃으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온 내 일이 의심 받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계에 눈을 뜨되 자기의 안경을 끼고 눈을 뜨면 그게 과연 눈을 뜨는 것인가? 편견이 진리이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 아닐까. 그러나 한국에서 살던 30년 이상 나도 그와 별 다를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이었으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았어야 할 일을 참지 못한 이 성질머리는 또 어찌한단 말이냐.

못난이의 도전 53
못난이의 도전 51

3 comments:

Anonymous said...

아 이분도 머릿속에 지우개가 심한 분이시군요 ㅋㅋㅋㅋㅋㅋ

SJ Lee said...

직업병이예요. 교수직업병.. ㅋ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은 진심으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그리고 말하고 싶은 건 언제나 다 말하고 마는. ㅋㅋㅋ

Wonjung Min 민원정 said...

여기서 직업병을 앓는 사람은 누구? 저요? 아니면 상대방이요? ㅋㅋ 하긴 저나 상대방이나 둘 다 공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끼리끼리 유치한 기싸움을 한거겠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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