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주재원 L께서 날 부르시더니 당신과 가족들의 스페인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셨다. 요즘은 스페인어과외교습이나 통역을 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절박하게 필요했으나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을 때였다.
L 댁은 산티아고 부촌에 위치해있었다. 지하철도 버스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사모님께 길을 여쭤보니 지하철 -- 역에서 colectivo (지하철 역에서 그 주위를 오가는 일종의 합승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셨다. 1월 여름 아침에 그 댁으로 가는 colectivo를 타면 주로 부촌에서 일하는 도우미아주머니들과 정원사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 시건방진 계급의식이 발동해서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택시를 타는 나 자신이 괜히 서글퍼졌다. 내가 이게 뭔가...
그런데 차차 colectivo 타는 일에서 재미를 발견했다. 우선 지하철 역에서 L 댁까지 colectivo가 가는 길이 승객들에 따라 약간씩 달라졌다. 누구는 어느 모퉁이에서 내려주세요, 누구는 어디 앞에서 내려주세요, 다니는 지역 범위는 정해져있으나 그 안에서 가는 길은 승객이 가는 곳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부잣집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colectivo 기사 아저씨와의 대화도 재미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내릴 때마다 그 주위 부잣집 구경도 실컷 했고 칠레사람들이 '길'을 설명하는 방법이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동네 사는 사람들도 시내에 나갈 때에는 굳이 차를 가지고 가지 않고 colectivo를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요즘도 나는 colectivo를 자주 애용한다. 우리 집에서 (미국)친구 B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5천 페소 (우리돈 만 원 정도)가 넘게 나오지만 집에서 몇 블록 걸어가 colectivo를 타면 500페소 (우리돈 천 원)이면 갈 수 있다. 이제는 굳이 친구집 바로 앞까지 가지 않아도 어느 모퉁이에서 내려야 100페소 덜 내는지 잔머리도 쓴다. 얼마 전 colectivo를 탔더니 기사 아저씨가 나한테 슬쩍 600페소라고 한다. "에잇, 아저씨 무슨 소리예요" 씩 웃으며 500페소짜리를 건내 주니 "어라라, 하하하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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