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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September 21, 2011

못난이의 도전 5

학생 E가 자기가 다음 학기에 수업조교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고 내가 하는 한국학관련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이었다. 마침 연구프로젝트를 따게 되어 두 가지 일을 부탁했다.

그 해 E가 운이 좋았던지 추천서만 써주면 덜커덕 합격이 되곤 했다. 한국단기장학생으로 뽑혀 두 주일간 한국에 다녀오고 미국 모대학 한국학센터 겨울방학 Intensive Course에도 장학생으로 뽑혀 10주간 다녀왔다. 한국에 갈 때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고 신나하던 E는 미국까지 가게 되자 그야말로 기고만장해졌다.

미국에 다녀오더니 자기에게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미국에 가보니 여러 대학 한국학학과 학생들이 모여 같은 주제로 토론을 하는 Workshop이 있더라며 그걸 칠레에서 해보고 싶다고 했다. "미국과 칠레는 상황이 다르잖니. 거기는 아시아학의 역사가 길고 한국학과가 있는 대학도 여러 곳이니 같은 주제로 토론이 가능하지. 하지만 칠레는 이제 아시아학이 겨우 발걸음이고 그나마 아시아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대학도 얼마 안되잖아. 어렵지 않겠니? 일단 Study Group ASIA (내가 이끌고 있는 동아리)에서 실험적으로 해보고 주제를 좀 넓혀보면 어떨까?"

E는 당돌하게 말했다. "아시아프로그램 교수들 profile을 봤는데요. 교수님 (나)은 여러가지 일을 많이 하시잖아요. 다른 교수님들도 학교에 무언갈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지 않겠어요? 이건 제가 아시아프로그램을 위해 특별히 기획한 거에요. 교수님 (나)한테 새로운 실적 드릴 생각으로 기획한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나한테 말을 꺼냈니? 이런 종류의 Workshop은 미국, 한국, 유럽.. 어디에고 널린거야." "아, 제가 다른 교수님들을 몰라서요. 소개만 해주세요." "글쎄, 나라면 Study Group ASIA에서 실험적으로 해보고 칠레에서도 먹히는 일이면 다른 교수들에게도 말해보겠다." "좋아요. 그럼 다음 Study Group ASIA 모임에서 얘기해보죠."

다음 Study Group ASIA 모임에 그녀가 오지 않았다. 그날 사정이 있어 못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럼 일단 대충 안을 잡아보고 나중에 더 구체적인 계획을 짜자, 학생들과 얘기해보겠노라고 해두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E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데 다같이 나눠서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안을 꺼냈다. 아이들이 이러저런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말그대로 Workshop이 있어 미국에 갔는데, 얼마 안 있어 E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이 왔다.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답게 거의 항의서에 가까운 메일이었다. 자기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어떻게 맘대로 휘두르느냐가 주제였다. 이어 페이스북에는 '베끼기'와 관련된 규정을 복사해놓고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교수에 대한 글을 올렸다. (내 이름은 안 올렸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다른 학생 B가 나와 E를 '화해'시켜주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얘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내가 그동안 뭘 가르친건가, 서운하고 괘씸하고 허무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이러라고 추천서 써줬나 유치한 생각도 들었다. Workshop에 오신 친한 미국인교수님께 얘기를 하니 "독창적인 아이디어? 베끼기? 하하하하하" 박장대소를 하셨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사람 보는 눈도 쑥맥이었는지 허망하다고 맥빠져 하는 나에게 교수님께서는 "Wonjung, don't mind. 네가 칠레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봐. 네가 거기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네가 누굴 조교로 쓰고 싶어도 아는 애가 몇 명이나 되었겠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니 네가 조교로 쓴거 아니야. 지금은 더 많은 학생을 알지? 이건 그냥 약이 되는 경험일 뿐이야. 그런 녀석들보다 좋은 녀석들이 더 많지. Wonjung, 우리가 왜 선생을 하는지 알아? 그런 기분 찜찜한 녀석들보다 앞으로 만나게 될 더 좋은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야."

못난이의 도전 6
못난이의 도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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