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에 근무하던 M에게는 이전 근무지에서 사귀던, 역시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남자친구 R이 있다.
이전 근무지를 떠날 때 M과 그녀의 남자친구는 이제 서로 사는 곳이 다르니 '쿨하게' 헤어지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도 그도 그렇게 '쿨'해지기는 힘들었던지, 가끔은 그녀가 가끔은 그가 서로 사는 곳을 오가는 원거리 연애를 계속했다.
그녀가 칠레를 떠나 그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R이 칠레에 왔다. 그녀와 가까이 지내던 외국인 친구들이 모였고 나는 그때 R을 처음 보았다. 키가 꽤나 컸던 M의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한 R을 보자마자 나는 미국 유명대학 경제학박사에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그의 화려한 이력이고 뭐고 실망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얘기를 들으며, 아, 스페인어를 이렇게 고급스럽게 할 수도 있구나, 잘난척하지 않아도 잘났다는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가 있구나, 감탄했다. 그녀가 왜 그를 '쿨하게' 놓지 못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게다가 모처럼 휴가를 내 칠레에 와 꽤나 오래 머물며 이런저런 그녀의 뒷정리를 모두 도와주는 것을 볼 때는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냥 결혼하지 그래. 결혼하면 R 사는 곳으로 가야 해서 그래?" 내가 묻자 M은 말했다. "그건 아니야. R은 내가 하라는대로 하게 다 둘걸. 그런데도 모르겠어. 결혼결심은 잘 서지 않아." M과 R은 아직도 서로의 사는 곳을 오가며 그렇게 친구 사이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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